올해로 워킹맘 19년 차가 되었다.
내년이면 아들이 대학에 가게 되니, '공식적'인 육아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임신 기간 내내 출산 5일 전까지 아이와 같이 일을 했다. 출산 후에는 너무나 고맙게도 운이 좋게도 시어머니와 시이모들이 다 같이 아이를 키워주셨어서, 그래도 맘 놓고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워킹맘으로서의 본격적인 고충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였다. 그나마 사립초등학교라 급식당번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3월이 지나자 1학년 학부모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전업맘과 워킹맘 그룹으로 나뉘었다. 일을 하지 않는 엄마들은 아이를 아침에 등교시키고, 학교 앞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가지곤 했다. 워킹맘들은 동동걸음 치며 출근을 해야 했지만.
학부모회 간부들도 대부분은 전업맘이었고,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카카오톡이나 알림장이 있어 늘 꼼꼼히 확인했지만, 항상 일말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혹시나 엄마인 내가 다른 엄마들은 다 알고 있는 정보를 놓쳐 내 아이가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제일 힘들었다.
전업맘들보다는 확실히 느렸지만 한 학기 정도가 지나자 워킹맘들의 네트워크도 생겼다. 워킹맘들은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키즈카페에 모여 네트워킹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몇 번 만나면서 깨닫게 된 재밌는(아니 슬픈) 사실은 그 자리에서의 최고의 권력자는 전업맘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 오는 워킹맘이었다. 전업맘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통해 얻어낸 학원정보나, 학교가 돌아가는 얘기 등을 알고 있는 워킹맘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떨고 있는 다른 워킹맘들의 길잡이였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를 초등학교에, 중고등학교에 보내는 내내 계속되었다. 아이에게 죄책감도 느껴졌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놀 기회가 있는 전업맘들의 아이들과 달리 내 아이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와야 했다. 물론 또 좀 느리긴 했지만 손자손녀를 픽업하러 왔다가 얼굴을 익힌 할머니 그룹도 생겨났고, 그 그룹에서 활발하게 뜨개질 강사의 실력을 발휘하시는 시어머니 덕분에 내 아이도 평일에 다른 할머니 그룹의 아이들과 함께 가끔은 키즈 카페도 갈 수 있게 되기는 했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아이를 한국에서 학교에 보낸 10년간, 워킹맘으로서의 미안함과 콤플렉스는 항상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작 아이는 불평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엄마 대신 할머니(들)가 계셨던 것도 있지만,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집에 항상 있지는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아주 어릴 때부터 했다고 했다. 그래서 플랜 B를 항상 찾을 준비는 했던 것 같다고.: 아주 아주 나중에 미국에 와서 아들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 말을 듣고 엄마로서 미안함에 눈물이 찔끔했지만 정작 '플랜 B'를 생각하며 커온 아들의 독립심은 미국에 와서 훌륭히 발휘되기 시작했다.
영어로 콜라도 못 시키던 아이를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Irvine에 있는 모든 공립 고등학교와 사립학교와 사전 인터뷰를 했다. 10여 개 학교를 찾아다닌 끝에, 한국인 학생은 없지만, 선생님과 학생의 비율이 1:10이 채 되지 않고, 학비도 상대적으로 많이 비싸지 않은 사립학교를 찾아냈다.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는 학교였으나, 이곳 교포들이나 미국인들에게는 꽤 유명한 개교 75년을 맞은 전통 있는 학교였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별적인 신경도 많이 써주는 느낌도 있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여름 방학 동안 ESL을 듣고 9월부터 10학년을 시작했다.
아침에 학교에 넣어놓고 나면 잘하고 있는지, 수업은 알아듣는지, 노랑머리 미국아이들 사이에서 적응은 잘하는지, 차별은 당하지 않는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걱정과 달리 아이는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수업시간에 질문하면 귀찮아하던 한국과 달리, 잘 못하는 영어로 질문을 해도 선생님들이 대답을 잘해준다고 했다. 어느새 반에서 제일 질문이 많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그리 두각을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남 아이들처럼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을 하던 아이도 아니었고, 이해가 안 가는데도 무조건 외우는 방식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 성향의 아이였다.
첫 학기에는 상대적으로 쉬운 수업을 듣긴 했지만, 우수성적학생 명단에 들어가 엄마 아빠가 눈물이 찔끔 나게 만들기도 했다. 첫 학기 동안은 인터내셔널 학생만 살펴주는 카운슬러와 정기적으로 상담을 신청해서 아이와 같이 갔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니 아이는 "엄마는 이제 안 와도 된다"라고 했다. "엄마랑 같이 학교 오는 애들 없다"는 말과 함께. 어느새 카운슬러와 일정을 잡고, 미팅에 맞춰 과제를 해내고, 반에서 수업을 듣는 아이들과의 조별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잘해주는 아이가 너무 고맙고 기특하다. 입시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다.
10학년부터 미국에서 시작할 때 모두들 너무 늦다고 했었다.
아이가 국제학교 다니다가 왔냐고도 물었고, 아니라고 하면 "와 엄마가 정말 용감하네요"라고 말했다.
내가 한 것은 용감하게 아이를 믿어준 것뿐이다. 잘할 수 있을까 불안해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던 나에게 아이가 "엄마, 아빠, 제가 최선을 다해볼 테니, 지켜보고 기다려달라"라고 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내 아이가 믿어달라고 하지 않는가. 생판 처음 보는 남도 믿고 일을 도모하는 판에 내 속으로 낳은 내 아이가 한번 믿어보라는데... 왜 나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걸까.
아이는 어쩌면 일하느라 바빴던 엄마 때문에 강제로 조금 더 일찍 스스로 하는 법을 익혔던 건 아닐까. 스스로 하는 위로일지는 모르지만...
전업맘도 워킹맘도 각자의 상황에 가장 맞는 선택을 한 것이고, 아이들은 신기하고 기특하게도 각자의 엄마의 상황에 맞게 잘 자랄 수 있는 잠재성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엄마라면, 그 엄마의 아이도 최선을 다해 자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아이임에 틀림없다.
나를 비롯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맘(워킹맘도 전업맘도 모두 위대한 맘이다)들과 그들의 아이를 위해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