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 그리고 언젠가는 화해가 있겠지.
아버지는 1976년부터 택시를 몰았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택시운전사였던 것이다. 군대 가기 전 차 정비를 배웠던 것이 도움이 되어 미군 예하 감시부대로 입대를 했다고 한다.
거기서 정비도 더 배우고 운전도 배워서 나왔다. 대경상고 중퇴라는 약간은 미흡한 학력과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인 탓에 직업을 선택하는 관계도가 별로 복잡하지 않았다. 쌀을 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했다.
내 어린 기억에도 아버지의 택시는 기억이 난다. '포니'라고 불리는 차였다. 연두색 혹은 물 빠진 녹색이었다. 동그란 메타 기를 꺾으면 요금이 올라가는 시절이었다. 아침에 나가는 아버지의 한 손에는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힌 기도하는 소녀의 그림이 있는 동전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택시만 해도 굶지 않던 시절이었다. 무려 스카이 콩콩을 보유하고 있었고 , 집에서 우유를 시켜먹고 한 장 짜리 학습지를 받아보는 집이었다. 일 끝나고 들어올 때면 술 한잔 하기 위해 당신께서 좋아하는 안주거리를 사들고 들어오는 여유 정도는 있었다.
집안은 망했고 가족은 흩어졌다. 내가 가족과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은 아마 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것이다. 천호동 단독주택 한 편의 문간방이었다. 그래도 사는데 별로 문제는 없었다.
개인택시를 오래전에 처분한 아버지는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그때도 사납금 채우고 나면 겨우 허기나 면하던 시절이었다.
택시는 늘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축구장에서 뭉친 다리를 풀곤 했다.
중학교에 올라갔다. 공용화장실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갔다. 아파트 이웃들은 공용화장실 때문이라도 참 살갑게 지냈다.
아버지는 이때쯤 노조일에 뛰어드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전까지는 일반 조합원이었다가 노조위원장이 되셨다.
가뜩이나 빠듯한 집안은 가장의 존재와 부재가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이 되어갔다. 가끔 정보과 형사가 오기도 했다. 머 딱히 겁은 안 났다. 정보과 형사들은 꽤나 친절하다. 아버지의 소재를 물어보는 거 이외에는 꽤나 친절했다. 가끔 용돈도 받았다.
집시법 위반으로 어딘가에 길게 짱 박히셨다는 말을 어머니의 통화에서 듣게 되었다. 늘 그랬듯이 별 걱정 안 했다. 그러다가 술안주 들고 스리슬쩍 들어오시는 분이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택시를 받았다. 어머니는 한숨 돌리시는 듯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노조일을 더 이상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신듯하다. 엄마의 크나큰 오해였다. 장외에서 더 신나게 참여하신 듯했다. 여전히 가장은 존재와 부재를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짬이 날 때는 낚시를 데리고 가셔서 낚시와 음주의 미학에 대해 설파하시는 취미는 여전했다. 택시는 '포니'에서 '소나타'로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택시 드라이버였다.
군대를 다녀와서 아버지를 찾았을 때 사실 좀 놀라기도 했다.
영원히 마도로스 같은 몸으로 사실 것 같은 분이 그 좋아하시는 소주를 못 드시는 상태가 되셨다. 억지로 정지시켜놨던 시간이 한 번에 달려든 형국이었다. 건강관리를 시작하셨다. 일 년에 두 번 찾아갔다. 낚시 이외에는 서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남자들은 그저 멍하니 앉아서 축구나 보고 있었다. 아들인 내가 정말 많이 양보한 것이다. 나는 축구를 정말 싫어한다. 아버지가 너무 축구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다시 소주를 따르기 시작하셨다. 건강이 돌아왔다. 아버지의 새 택시는 '그랜저'로 조금 커졌다.
29세에 나는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전까지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게 되고 급작스럽게 졸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생활비를 제하고 보니 다음 주에 등록금을 내기에 약간의 돈이 부족했다. 대학교 입학금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부탁을 했다. 아버지는 잠실 교통회관 앞으로 오라고 했다. 차를 세워놓고 교통회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부끄럽기도 했다. 서른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여전히 건건이 하나 해결 못하는 아들이라니. 아버지는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받고 바로 내뺄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교통회관을 바라보며 내뱉듯이 말을 이어갔다.
"저기 봐라. 오늘도 택시 면허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잖아. 택시 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 누구나 하려 하는데 쉽지 않아. 저 중에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쁜 놈들도 많아. 그런 놈들이 사고 치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도 욕먹잖아. '저러니까 택시나 몰고 살지'라는 말이 난 제일 싫다. 내가 배운 게 없어서 시작했는데 아직도 이 짓을 하고 있어. 이제는 귀도 잘 안 들려. 젊은 손님들이 화를 내고 내릴 때도 있어. 사실 그만하고 싶지. 근데 지금 내 나이에 다른 일을 할 게 없잖아. 난 평생 운전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나는 너한테 한 번도 부탁이나 강요를 한적은 없어. 근데 한 가지는 꼭 부탁할게. 택시는 하지 마. 그럼 내가 한이 생길 거 같다."
아버지는 여전히 존재하나 부재중이다. 할아버지 장례식 이후로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별 걱정은 안 한다.
늘 그랬듯이 혼자서 택시 몰고 적당히 다니시다가 쉬는 날은 낚시를 가신다는 이야기는 돌고 돌아 나에게도 들리니까.
평생 그렇게 사신 분이니까 지금 바뀌라고 말씀드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택시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늘 그랬듯이 택시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그러면 다행이다.
사실 진지하게 택시를 할까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운전하는걸 워낙 좋아하는 데다가 운전 스트레스를 거의 안 받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택시가 멈추면 그때쯤 생각해봐야겠다.
낚시 갈 때 참 좋다. 택시 타고 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