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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천이 죽었다.

by 밥 짓는 사람

그때는 내가 삼십 대에 막 진입하기 전, 그러니까 학교는 다니는 둥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1년에 아버지를 찾아가는 날은 정해져 있다. 추석 그리고 설날. 그 외에 아버지를 따로 만나는 일은 없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남들이 하는 만큼 안부를 묻는 정도. 그때도 대충 그랬던 것 같다. 명절에 딱 맞춰 찾아가면 차도 막히고 , 밥 얻어먹을 식당도 별로 없고 , 결정적으로 '진짜 명절에 가족에게 인사 온 것 같아서 ' 그게 싫어서 명절 전이나 명절 이후 찾아가곤 했다.


아버지 집에서 먹는 아침밥상 자리였다. 별 대화 없이 각자 밥을 먹던 그때, 아버지가 티브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상천이 죽었네? " 보청기를 안 끼시면 평소에 먼저 말을 안 꺼내는 사람. 밥을 먹는 시간이긴 했지만 말하는 목소리가 말라있었다. 대화에 응해야 했다. "이상천이요? 무슨 뉴스예요?"

티브이 하단에 뉴스가 흐르는 칸이 있다. 그곳에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재미 프로당구 선수 이상천 별세'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저렇게 거명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 암튼 나는 이상천의 이름을 몰라 다시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예요? 아시는 분이에요?"

"응 , 대충 예전에" 더 이어갈 말 재료가 없었다. 머 어찌어찌해서 아는 분이겠거니, 바둑 좋아하면 바둑기사 이름 알고 있고, 야구 좋아하면 야구 선수 이름 댈 수 있는 거니까. 더 묻지 않았다.


식사 후, 과일이 나왔다. 식사시간 보다 더 지루한 시간. 물론 과일을 깎아주신 분께 성의 있는 웃음도 보이고 접시를 받아 챙기는 리액션도 충분히 했다. 아버지는 짐짓 바라는 바가 있으신 듯했다. 물론 나도 눈치로 알고 있었다. 저번 자리. 그러니까 지난 명절이었던가? 같은 식탁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어머니라고 부르고"


아버지와 같이 살아주는 분에게 호칭을 부여하고 싶으신가 보다. 그전에 몇 번 뵈었던가? 기억이 없다. 물론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서 머 그냥 쉽게 할 수도 있는데 , 그게 잘 안된다. 무슨 복으로 엄마가 둘이야. 원래 엄마는 빛에 쫓겨 얼굴도 잘 못 보니까 그냥 이참에 호칭 소유권을 이전하라는 말 같기도 하고 암튼 잘 안된다.


사과를 씹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오전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이 시간까지 잘 넘기면 낮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익숙한 루틴을 마치고 ,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따라 나오신다. 저 아래 세워놓은 차 때문에 나가시나 보다. 같이 내려가는 길에 먼저 말을 꺼낸다. "소주 한잔하고 가라. 안 바쁘면 " 대답을 바로 했다 "네. 근데 무슨 할 말 있으세요?" 대화가 원래 이렇다. 식순을 모두 뺀 몸통만 있는 허식 없는 대화. 국민학교 때 쪽배 타고 견지낚시 배울 때도 그랬고 , 중학교 때 아빠 혼자 드시는 술자리 옆에서 맥주 한잔 얻어서 홀짝 거릴 때도 그랬고, 고등학교 때 밤새 둘이서 비디오 빌려온 거 보면서 라면에 소주를 나눠 먹을 때도 그랬다. 아버지와 대화는 이렇게 잔가시가 없다.


상대원동은 평지가 없다. 어디로 가던 전부 높낮이가 심한 길이다. 아버지가 앞서가던 내가 뒤에 서서 가던 서로 낙차를 극복하면서 걸어간다. 공이라도 굴러가면 좋겠는데, 아무 말도 없이 내리막을 걸어가다가 물었다. "뭐 드실래요?" "너 좋아하는 거 먹자"

제일 어려운 말인데 , 저말. 너 좋아하는 거. 아버지가 내가 멀 좋아하는지 알긴 하나? 그냥 의례 하는 말 치고는 너무 잔인하잖아. 무려 밥 한 끼 먹는데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히스토리를 몽땅 뒤져야 하다니.


나 좋아하는 것을 골랐다. 아버지가 술안주 하실 만한 것으로. 돼지갈빗집이다. 이 정도면 상의한 흔적이 있어 보이겠지. 아버지 술잔은 칠성사이다 컵이다. 저렇게 드시는 건 막일 아저씨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약간은 경멸하는 생각을 갖고 살았는데 , 아버지 잔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막일 계급이고 , 별 볼일 없는 인생인 것이지. 잔 하나도 청바지처럼 말이지. 작업 잠바 같이 말이지.

편견은 책정리 할 때 쓰는 색깔 있는 책꽂이 같다. 구분하기 쉽다. 위인전, 동화, 지리책 이렇게 나눈 것 같이 수사가 별로 필요 없는 아주 사소한 분류기호. 소주잔으로 사이다 컵을 쓰는 인생이라. 거기서부터 아버지의 러닝셔츠 패션도 , 안주도 먹는 김치 한조각도, 술 마시고 피는 담배도 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분류코드 사이다 컵. 아버지는 돼지갈비를 매력 있게 굽는 분이었다. 그렇게 집중해서 입술에 주름이 잡히는 표정으로 '불판이 거의 타지 않도록 , 한 번도 갈지 않고 굽는' 기술자였다. 그 기술 말고 입술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구나 딱 한번, 당구 칠 때는 저 표정이 나오더라.


"근데 이상천이 누군데요?" 아침에 밥상에서 던진 질문의 이어 짐이다. 사실 아까는 밥상 박자에 맞추기 위해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이상천 그 이름을 모른다. "있어.. 그런 사람. 되게 유명한 당구선수야"

양귀문은 들어봤다. 이정선 기타 교실처럼 양귀문 당구교실 같은 책을 본 것 같았다. 이 시절, 당구는 미성년자 금지 스포츠였다. 도박이기도 했고, 당구장 안에서 담배도 피우고 그러니까 스포츠와 사행성 그 중간을 맞추지 못해 금지된 공간이었다. 우리 집에서 당구는 굳이 경찰이 단속하는 금지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집안의 금기였기 때문에 먼저 당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내가 당구장을 처음 가본 것은 중3, 굳이 타락하는 방법을 찾겠다 같은 것은 아니고, 그 나이 친구들이 하는 궁금증'당구장에 가보고 싶다' 정도로 시작했다. 암사동 사거리에 있던 곳인데, 일탈을 목표로 하는 아이들이 몰래 들어가기 쉬운 곳이었다. 아저씨는 당구장 다이 관리를 안 했고, 우리처럼 슬쩍 오는 손님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당구 몇 번 경험해 봤지만 누가 가르쳐 줄 사람이 있던가. 교보재가 있던가. 룰도 모르는데 공 맞추는 것 몇 번만 해본 정도, 내가 그 이후에 당구장을 본격적으로 가본 것은 고1 때 교회에 나가면서부터다.

암사동에서 살다가 혼자(?) 수서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니 동네에 같이 놀 친구가 없어짐에 대한 공포, 나를 일신여상 앞 교회로 인도하게 되었고, 동갑 친구인 창호가 '너 당구는 칠 줄 아냐?'라는 말에 기죽기 싫어서 '응'이라고 대답하고 당구장에 멀뚱멀뚱 서서 한 번도 펴보지 못한 담배도 물고 서있게 된 모습. 그러니까 당구 가 주가 아니었다. 기죽기 싫어서 껄렁대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타율적으로 방문한 곳.

그런데 하필 그날, 몇 번 가보지도 못한 당구장에서 두 번째 피는 담배를 입에 물고 대충 흉내만 내고 있을 때, 경찰 단속이 들이닥쳤다. 물고 있던 담배는 자연스럽게 떨어지더라. 머 어차피 입으로 물고 입으로 뱉던 연기였다. 경찰도 그것을 아는지 담배는 별말 안 하더라. 다만 당구장 출입 자체가 문제였다. 집으로 전화가 갔다.


그날 저녁, 집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가 거의 울먹이듯이 말을 한다. "당구는 안된다. 차라리 술 담배는 몰래 하던지 해라. 당구는 이렇게 빌께" 무릎을 꿇고 앉는 엄마에게 "알았어요 잘못했어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술 담배를 하라는 말은 좀 놀라웠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당구는 안쳤다. 그 약속은 일 년 정도 지켜졌지만 어디 그게 쉽나. 고등학생인데. 암튼 집에서는 절대 당구 이야기, 단속을 당하는 일도 없도록 주의했다. 그 이유를 고3 때 듣게 되었다. 길게 말하지도 않던데.

"네 아빠가 당구로 집도 날려먹었어"

원래 그렇다. 사건 사실이 거대하거나 명확하거나 혹은 자랑거리가 아닐 경우 사건에 대한 묘사와 평가는 단호하고 짧다. 정말 집을 날려먹긴 한 것 같다. 어떻게 날렸는지 그것까지 묻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의 아빠는 집을 날려먹을 재주는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다시 그 일에 복무하고 있지 않은데 굳이 언급할 필요 있을까.


"그러니까 이상천이 하고 당구를 친 게..."

회상도 잘 안 하시는 분이고 , 예전에 내가 말이지 라는 이야기 전개도 거의 없는 냥반. 게다가 당구 이야기라니 , 어릴 때 당구장 가서 혼날 때도 같이 혼내지도 않고 저 멀치감치에서 신문이나 접고 펴고를 하시던 분이라서 당구 이야기는 좀 흥미로웠다.


"청량리에 맘모스 백화점 있었잖아. 그 옆 건물이 당구장이었는데 , 거기서 게임을 했지 아마. 잘 쳐 이상천. 내가 뭘 해보지도 못하고 진거야. 내기? 그렇지. 그때는 다들 그렇게 내기들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 이상천이가 서울대 다닌다고 했는데. 당구도 잘 치는데 서울대라고 하니까 다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 뭐. 무슨 내기냐고? 그때.... 아마. 이상천이가 한 학기 등록금을 걸었던가? 돈은 그 정도였던 것 같은데"

얼마를 걸고 얼마를 잃었는지 궁금한 척 장단을 맞췄다. 머 그때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 알아서 뭐 하겠는가. 아버지의 추억인데. 저런 이야기 잘 안 하시는 분인데.


별 볼 일 없이 사는 중이었다. 가장이 돈을 벌고, 가장이 허튼짓을 하고 가장 때문에 사글셋방으로 옮기고 가장이 집을 나가고 가장이 다시 부활하고 의 가장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저 별 볼 일 없는 남자는 가장 역할을 하는 대신에 서열 싸움도 없고 , 부담도 없이 방계의 왕족처럼 , 물론 대단한 권세가 없으니 집안 밥상에 앉는 자세 정도로만 권위를 취한 것이고 , 누구에게도 가장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머 나는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그 정도의 사소한 권위는 늘 지켜드렸다. 가장으로서는 점수가 낮았지만 아버지로서 , 친구로서의 저 남자는 꽤나 매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별 볼 일 없다는 표현도 지금 끌어다 쓰는 표현이지 엄마에게서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러니까 경제적 부위를 책임지지 못하는 '부위' 계급.

그 권위의 상실에서 누구도 탓한 적 없으니 매력적인 가부장이었다. 저 남자가 사는 법은 말이다.


원래 살던 엄마와 이혼하고 지금 이렇게 년 단위로 찾아뵙는 구조에서도 저 남자는 사실 경제력을 감당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살고 있는 아파트는 재산 가치가 잘 없어 뵈는 산동네 낡은 아파트. 본인 것도 아니고 , 오직 택시 한 대, 늘 그 정도였다. 택시 한 대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사람. 아끼고 살피고 닦는 것도 택시 하나였는데 , 저렇게 성실(?)하게 살던 분이 겜블러 같은 삶을 살았다니 좀 궁금해지긴 했다.


청춘 동의. 별 뜻 없는 단어를 입에서 웅얼거리면서 아버지가 다 드신 칠성 사이다 컵에 소주를 한잔 더 담아드렸다. 재미있지만 잘 못 알아듣는 이야기. 청춘 담화, 무용담, 모순. 그러니까 이상천하고 게임을 하던 그 정도로 당구를 잘 치던 분이셨구나. 하지만 진 사람이네. 이상천에게 진 사람이 청량리에서 줄을 세우면 아마 서대문 까지는 수두룩 빽빽할 텐데 , 그중 하나가 된 것인데도 저렇게 추억이시네.


이상천 이야기 이후 명절에 내가 찾아가면 우리의 아침은 조금 달라졌다. 아침을 먹고 , 과일을 먹고 예전 같으면 집에서 소주를 한잔 받아들이고 별 말없이 축구를 틀어놓고 , 보청기를 안 끼신 아버지와 별 대화 없이 축구를 보다가 낮 시간이 되면 돌아오던 하루였는데 , 조금 달라졌다. 아버지와 당구장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는 당구장에 갈 때는 보청기를 낀다. 소음이 상당할 텐데 개의치 않는다. 나는 아버와 당구를 칠 때 "200"을 놓고 칠 때도 있고 "300"을 놓고 칠 때도 있다. 별 상관없다. 아버지는 스코어 판에 있는 그 단추를 전부 밀어내고 치시니까. 그러니까 점수가 별 의미 없는 분이라고. 내가 치는 공이 마음에 안 들면 공을 잡고 다시 치라고 올려놓으신다. 가르치는 것이다. 청춘일 때도 저랬을까? 공을 세우고 공을 돌리고 옆테이블 아저씨들이 휘둥그레하면서 공을 바라보고. 아들 앞에서 입술의 팔자주름이 꽈악 잡히는 모습. 저랬구나.

이십 대의 아버지는 저렇게 근사하기도 했겠구나.


이상천에게 발린(?) 금액은 소소했던 것 같다. 나중에 엄니에게 수십 년 전 그 남자는 어땠는가 하고 묻는 시간에 "아빠가 당구를 잘 쳤어?"라고 물어보니 "야! 그 목숨보다 귀한 택시도 한번 팔아먹었어"

어이쿠야. 정말 청춘이셨구나. 그 실패한 삶. 연속하지 않고 한번 돌멩이 밟고 튀긴 청춘이네.

어떡하지요? 아버지 아들은요. 어찌 보면 참 무료하게 살고 있어요. 그렇게 큰 배팅도 해본 적도 없고, 평생 소중히 생각하는 택시 같은 것도 없고 말입니다. 아버지 당구공 흐르는 것 보는 것처럼 늘 남의 삶만 구경하면서 살다 보니 무용담 하나가 없네요. 그것도 아빠로서의 미덕 일 텐데 말입니다. 흐르는 삶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상천이 죽었다. 그 뉴스 덕분에 아버지의 이십 대를 ,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 맞다. 거푸 잔에 소주를 마시게 된 것도 그때 즈음부터라고 한다. 질 줄 몰랐다고.

어쩌면 이상천 덕분에 당구를 살살 취미로 치게 된 것 같다고. 여러모로 은혜다.

당해볼 만한 패배다. 아버지로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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