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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Jan 13. 2021

청평유원지

하루를 피하는 방법

광고대행사에 다닐 때였나?
전 직장을 유쾌하지 않게 그만두고 옮긴 회사였다.
원래 다니던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로 옮겨서 가진 것 없는 미래를 담보해보겠다고 나름의 배팅을 했다.

전공도 경력도 거리가 먼 일이었다. 출근길이 멀었으니 내 처지와 딱 맞았다.
회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했다. 접대를 위해 나오는 차는 제네시스 아니면 아우디. 정부 및 관공서 광고를 받아 운영하겠다는 사업계획서.

그러나 현실은 인지부조화 상태였다. 회사 재정은 엉망이었고 나는 가장 가까이서 그 내용을 지켜보고 듣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늘 망가진 허세를 부리면서 아랫돌 빼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재정은 엉망이 되었고 나는 회사를 나가도 할 일이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막냇동생이 회장임을 자랑하시던 ) 엄마에게나 , 주변인들에게도 나의 부도상태를 말할 수 없었다.

아침 출근시간. 면목동 전철역 앞에 서있다가 어딘가로 가야 했다. 친구들은 전부 출근한 상태였고 피시방을 가도 할 일이 없었다. 차라리 주식이라도 하면 앉아있겠는데 말이다.

한날. 엄마가 주무시는 틈을 타서 낚시가방을 챙겼다. 옷은 정장인데 가방은 등산가방이었다. 두어 정거장 걸어가니 상봉역 근처다. 저기 정류장에 보니 청평 가는 버스 표시가 있었다.
친구 현태와 두어 번 루어낚시를 위해 갔던 청평유원지가 생각났다. 버스로 가면 50분쯤 걸리는 곳이다. 출근시간보다 더 짧다. 이득을 보는 기분이다.
아침 청평으로 가는 버스는 한가했다. 이 시간에 다들 서울로 출근하는데 나는 반대로 가고 있으니 한가로웠다. 공기도 좋은듯한 건 단지 기분이었겠지만 말이다.

청평유원지 앞 김밥가게에서 김밥 두 줄을 산다. 어차피 물밖로 나오려면 그것도 번거로우니까 물속에 서서 먹을 요랑이였다. 아침 물안개가 사라질 시간이다. 이제 강한 햇빛만 피하면 된다.
물속에 들어갈 옷으로 갈아입는다. 루어대와 태클 박스라고 불리는 가짜 미끼 통을 미니 쌕에 넣고 물에 들어간다.  오랜 시간 동안 방치했던 낚싯대와 릴은 조금은 서걱거리는 듯했지만 괜찮다.
어차피 예민할 필요도 없는 낚시꾼이다. 그냥 물속에서 던지고 감고 다시 던지고 감고... 반복만 하면 된다. 평일날 아침. 그리고 물놀이 하기에는 조금 이른 계절. 물만 흐르고 사람은 없다.
반나절 물속에서 반대편 암벽을 보면서 던지고 감고 던지고 감고... 가끔은 낚싯줄을 끝까지 풀어보기도 하고 그냥 내버려두기도 한다. 아차.... 이번에는 가짜 미끼조차 안 끼웠다. 괜찮다. 어차피 흘리려고 던지는 줄이다.
시간도 보내고 어찌할지 모를 하루도 흘리는 중이다. 며칠이 지났다. 가끔은 추운 기운도 느껴지긴 했지만 던지고 감으면서 보내는 시간은 이제 나름 일과처럼 유지되고 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줄을 감고 마친다.
아침에 김밥을 안 사 왔더니 물색없는 허기가 오후 내내 신경 쓰였다. 유원지 앞 순댓국집을 간다. 며칠 가다 보니 혼자 먹는 자리도 왠지 내 자리 같다. 처음에는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서 젖은 바지와 옷을 한번 헹구었다.
3일쯤 지났나?... 거의 비슷한 시간에 순댓국집에 들어서니 연배가 비슷해 보였던 순댓국집 사장님이 말을 건다. " 화장실 안쪽에 슬라이드 여시면 거기 샤워기 있어요. 그거 쓰세요."  고마운 일이다. 순댓국 온기로 부족한 체온을 채워 주셨다.

소주는 두병 정도가 적당하다. 말을 나누지 않고 묵묵히 티브이만 보면서 마시는 술은 그 정도가 적당하다. 회식을 하고 집에 들어갈 때 정도의 취기다. 서울행 버스. 막차를 탈 때도 있고 그 앞 버스를 탈 때도 있다. 그 시간 돌아오는 버스는 여전히 한가하다.
다시 상봉에 내린다. 걸어서 면목역까지 간다. 면목역 앞 시장 골목에 이제 장사를 마무리하는 족발집이 있다. 저녁을 순댓국을 먹었지만 족발을 사들고 들어갈 타이밍이다. 미니족발을 가끔 찾으시는 엄니에게 족발 한 봉지 드리고 방에 들어왔다.
낚시가방은 순댓국집에 놓고 왔다. 여러모로 감사한 일이다. 그냥 가서 옷만 갈아입으면 된다.  물고기는 안 잡혔으면 좋겠다. 잡을 생각도 없는데 괜히 달려들면 미안한 노릇이니까.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니  유원지 뒤편 막걸리 집 평상에 앉아서 낮술 먹는 시늉을 해야겠다.
비 오는 날 막걸리 먹으려고 회사에서 도망 나오던 기억이 있으니 얼추 맞는 상황이다.

한 달 동안 조과는 형편없었다. 꺽지 한 마리. 누치 한 마리.... 놔주는 게 일이다. 나는 의지가 없는데 말이다.  
한 달이 지났다. 새로운 일을 찾았다. 그러니 이제 낚시도 접을 때다. 저녁시간 상봉 정거장에서 면목역까지 걸어가는 취미도 당분간 접는다.
다시 낚시를 하러 올 때까지 낚싯대를 잘 모셔놓기로 했다.

낚시나 하러 갈까?....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 아침 해뜨기 전 청평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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