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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Jan 14. 2021

개봉동 할머니

밤새 고아낸 사골보다 더 깊은 할머니 기억

나는 외할머니 등에서 자랐다. 걸어서 돌아다닐 때도 외할머니가 근처에 있었다. 개봉동 아파트 단지에서 할머니가 민화투 치고 있으면 늘 옆에 앉아서 짝 정리를 해주던 타짜 조수였다. 할머니는 손이 야무졌다. 한 번도 그 치열한 돗자리 판에서 빈손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사실 노동 투입 대비 말도 안 되는 수입이다. 쩜당 10원짜리 민화투를 치다니. 차라리 폐금광 아래 하천에서 사금을 캐지.

해가지면 그 치열한 하루의 겜블은 끝이 난다. 불법도박장에 조명을 비춰줄 만큼의 배려는 늘 없었다.

할머니가 약간 굽은 등으로 걸어가시다가 늘 들리던 가게에서 또 부르신다" 밥 먹어야 되니까 한 개만 골라"
나는 오십 원짜리 하드 한 개... 할머니는 담배 한 갑.
오늘도 수렵은 성공적이었다...
할머니가 치매로 집에 오신 건 내가 고3 때였다.
전문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한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득불 우겨서 모셔왔다.

몸도 작아지셨다. 낮에는 누워만 계시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만 겪으셨다.  나와 동생은 괜찮다고 했지만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했다. 한날 아버지가 나와 동생을 불렀다" 할머니가 좀 아프시고 힘들게 해도 니들이 싫은 티 내면 안돼. 니들은 외할머니 등에서 자랐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집안에서 느껴지는 환자의 체취도. 늘 일상적으로 끓여대던 곰탕의 냄새도.

할머니가 한번 사라 진적이 있었다. 잠깐 한눈판 우리에게 아버지가 정말 화를 많이 냈다. 다행히도 발견되어서 돌아오신 건 네 시간 이후였다. 길었다.

새벽이 되면 가끔 정신이 돌아오셨다. 새벽 네시 정도였다. 한참을 우셨다. 신세에 대해... 수치에 대해... 고통에 대해...  옆에 앉아서 괜찮다고 손만 주물러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늘어진 피부를 주물러야 했다.

할머니는 외삼촌 집으로 돌아가시기로 했다.
말들이 많았나 보다. 큰아들이 모시지 않고 둘째 딸에게 전가했다는 말을 그냥 넘기실 외삼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가셨고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돌아가신 건 우리 집에서 가신지 일 년 정도 후

외갓집의 형편을 생각해 자세한 이야기는 적지 않겠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연배가 제일 어렸다.
나는 제사상을 엎으려다가 말림을 당했다..
외할머니한테 방학숙제로 재활용 로봇 만들어야 된다고 하니까 견적을 요청하셨다.  얼마나 크면 되냐고.
"크면 다 좋아"

외할머니는 단골 개소주집에서 한약 박스를 가져다주셨고. 몸통이 그따위 사이즈니까 로봇공학 못 배운 나는 다리에는 댓 병 두 개씩 머리는 구론산 디 박스로 만든  울트라 사이즈의 로봇을 만들었다.

할머니가 새벽에 소피보러 가시다가 놀라서 두어 번 주저앉은 사이즈의 로봇이다.

할머니가 피시던 담배가 백자였나....?

담배 맛있게 피우는 여자를 보면 설렜던 것도 이유가 있나 보다.

개봉동 아파트 단지 구석에서 담배 하나 꼬나무시고 패를 쪼시던 할미새가 생각나서 그런가 보다.


낮에 일터에 앉아 티비를 트니 등이 굽으신 할머니가 손주 주려고 피자 시키면서 혼란속에 너털웃음 짓는 방송이 나왔다. 다행이다 . 나때는 피자가 없어서 외할머니를 혼란스럽게 한적이 없어서 .  


지금은 외할머니의 딸 , 그러니까 나의 엄니가 외손녀들에게 젤리 이름 못외운다고 타박을 받고 있다.

간섭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넌즈시 조카들에게 다른 사탕을 쥐어준다. 근심 한조각 덜어내는 시늉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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