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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Jan 17. 2021

육개장

장례식장 , 가장 따스한 한 그릇을 대접해야 하는 시간

새벽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조문을 오신 분이 있다. 아버지의 손님이다. 지금 막 주무시는 아버지를 굳이 깨우지는 마시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이다. 상주 역할까지 해야 하는 고된 시간이다. 지난하다. 오늘 새벽이 지나면 벽제로 떠나야 하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들만 들린다. 비록 할아버지와의 교류가 끊긴 지 십수 년이 되었지만 해야 할 도리는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손님들이 오지 않는 시간이다. 잠을 자는 것은 애초에 글렀다. 버텨야 했다.

조용한 장례식장에는 향내음만 길게 깔려있다. 평온한 냄새다. 쪽잠을 청하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긴 잠을 시작한 각 호실의 망자들에게도 도움이 될듯하다. 잠을 떨어내야 하길래 불 꺼진 주방으로 향했다. 큰 들통을 열어보니 식지 않은 국이 남아있다. 육개장이다. 벌써 몇 끼를 이것으로 때웠는지 모르겠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공간에서 가벼이 훌훌 넘기는 육개장은 활력이 넘치는 색과 맛을 가지고 있다.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와 좋지 않은 영을 멀리한다는 구태적 해석은 차치하고서라도 한국땅 어디를 가도 거의 비슷한 대접을 받는 음식이다. 아. 전라도는 된장국이 나오기도 했다. 진한 육 기름과 고춧기름이 떠있는 국물을 종이컵에 담아낸다.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일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육개장 국물도 잠 깨는 역할로는 매우 효과적이다. 호로록하면서 한 컵 마시고 나니 잠이 깬다. 더불어서 속도 쓰려지고 더부룩해진다. 기운은 나는데 더부룩하기까지 하니까 잠은 효과적으로 깼다. 아침까지는 버틸 힘이 있겠다.

마지막 기운을 내야겠다. 도리를 한다는 것은 한쪽에서라도 하게 되면 면피가 된다. 도리를 했으니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양에서처럼 고인을 추모하고 때로는 유쾌하게 보내지는 않지만 한국의 장례 역시 개인의 역사를 복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밋밋한 드라마 정도는 된다. 아침이 오면 버스를 타고 갈 것이다. 오후까지는 그저 잘 돌아오기를 서로에게 바라면서 말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몇 년 전이었다. 학생부군신위 같은 삼일이었다.
블랙코미디의 연속이었고 그게 이 집안의 색깔임을  적나라하게 증명해주었다. 그때도 비가 오는 여름이었다.

육개장을 먹을 때마다 그때 그 밤의 블랙코미디가 생각난다.

검은색의 짧은 스커트의 여성들이 들이닥쳤다. 고모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과한 복식 예절 덕분에  그새 벽 장례식장 나머지 빈소의 아저씨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씁쓸한 풍경이 흘렀다.

죽음 앞에서 활력을 찾았다.  영화 '학생부군신위'에서나 묘사될 장면이었다.

미국식 농담을 더한다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하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마운 마음만 받고 서둘러 돌려보내야 했다. 성스러울 것은 없지만 굳이 성스러울 일을 만들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한 scene으로 마무리되면 오늘 하루의 존재감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주들이 쉬는 공간. 아니나 다를까. 조의금 문제로 투닥거린다. 귀가 안 들리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장례식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 ' 아버지의 직계 형제들을 잠시 모이게 한다.

"아버지와 나는 십원도 손대지 않을 테니 나중에 알아서들 하시고.... 제발 부탁인데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으니 효도하는 마음으로 더 이상 시끄러운 소행사는 그만 하십시다 들"  그게 아마 그대들의 첫 효도이자 마지막 효도일 테 네 말입니다...라고 속으로 읊조렸다

나머지 일이야 머 소소한 정도. 납골당으로 모신다 만다 하는 정도.  스님이 계시는 암자로 차가 못 올라가서 새 차를 다 긁어먹은 정도. 소소한 일이다.


아버지와 헤어진 곳은 중랑구 모 처 사거리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에게 해본 적 없는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아버지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푹 쉬시고 나중에 조용할 때 조용한 곳으로 낚시나 가요"


장례식이 그렇게 시끄러운 행사인 줄은 몰랐다. 손님으로 갈 때는 망자를 위해 말수를 줄이고 소리를 낮췄는데. 내가 상주가 되니 모든 소리가 다 들린다. 크게 들린다.

망자의 소리만 없는 공간이었다.


그날 저녁밥은 뭉근한 불에 조용히 끓인 누룽지였다.

붉고 푸르고 기름지던 육개장은 충분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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