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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Jan 17. 2021

껍데기의 삶, 껍데기의 맛

그대 , 오늘 기억하는 이 맛은 내일 다시 오지 않는다.

‘맛’ 이 있다.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맛이라는 것이 표준화된 것도 아니고 맛을 잘 아는 사람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맛을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역사에 기대 지금의 접시를 아름답게 표현해주는 식탁 위의 호스트"라는 별칭이 어울리지 않을까. 덕분에 우리는 그 맛을 한 번에 혹은, 다른 것과 더해서 기억하고 상상하며 시간을 아끼는 것 아닐까. 세상 진미를 모두 올려놨다는 '만한전석'을 황제가 과연 사랑했을까. 하는 배 아픈 상상도 해본다. 뭐 어쩌면 만한전석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만나보겠다는 상상은 결코 소진되지 않으니.

맛은 ‘그 맛이다’가 어울린다 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힘으로 엄마젖을 빨던 그 시절을 만약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시절도 열심히 살았다고 기억하는 것이고 , 엄마를 추억하는 이야기의 개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파혼당하고 쓸쓸히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친구.
그 앞에 놓여있던 국밥. 기름기가 굳어져가던 그 추운 저녁. 그때 먹었던 국밥은 그때 그 쓸쓸함의 맛이다.

그래도 가끔 그 국밥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친구의 안부가 생각날 때가 돼서 일 것이다. 그 국밥이 나에게 남긴 건 그저 흔한 소기름 따위였으니까.

어느 한날 새벽. 갑자기 울린 전화를 받고 득달같이 달려 나간 그 자리에서 만난 하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던 미소가 하얀 여자. 그 여자와 함께 먹던 싸구려 짜장면. 그때 그 기름기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그 시간에 짜장면이 아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짜장면을 사랑한다. 그 여자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술이 취하면 그렇게도 짜장면을 찾았던 것을 보면 시대에서 탈락하기 딱 좋은 '무능한 로맨티시스트' 같은 시절이 있었나 보다. 짜장면에 맛이 어디 있나. 테이블에서 깔깔대던 그 웃음만 기억나지.

1998년 홍대 전철역 뒤편 , 속칭 껍데기 거리. '대포'라는 이름의 포장마차가 대로 가운데에 연이어 줄줄이 이어져있고 , 사람들은 포장마차 양 옆으로 지나가면서 가끔 포장이 들썩이면 그 안에서 나오는 '치이익 ' 하는 소리에 이끌려 돈도 없는 주제에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포장마차 안에서 우리를 반기는 것은 단돈 오천 원이면 만날 수 있는 커다란 돼지껍데기 . 당시 강남에서는 이 비루하고도 기름진 고급 안주가 학생들의 지갑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안주였지만, 홍대 앞 대폿집에서는 단발소녀의 얼굴보다 커다란 한 장이 겨우 오천 원이었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각출해 자리에 앉으면 연탄 불위로 껍데기 두어 장, 양파가 송송 썰어져 있는 간장 양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주는 갈색의 콩가루가 있었다. 껍데기에서 흐르는 기름기는 콩가루에 갇혀 자기 할 말 대신에 그저 끄덕이기만 하는 고소함이 되었고, 낮에 연습실에서 투닥거리면서 말도 안 건네던 서투른 아마추어들은 껍데기 한쪽씩 서로에게 밀어주며 찰싹 붙어가는 입술을 혀로 더듬거렸다. 껍데기 이야기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 당신들의 황금기를 지나 노동의 안정기를 찾았을 때 하는 의례 같은 것.

" 난 저 음식은 쳐다보기가 싫어. 저 음식을 보면 고생하던 그때가 생각나" 그리고 스스로 무언가를 이룬 사회적 존재라는 자긍심이 육체적 열등감을 앞서기 시작할 때 , 다시 말을 바꾼다."지금 와서 이걸 먹으면 예전 맛이 나고 내가 참 열심히 살았어. 이맛이 참 맛이야" 그렇게 불려진 우리네 아버지들의 수많은 연탄구이들. 찌개들은 결코 '성골의 맛'을 지닌 음식이 아니다. 그저 그런 청춘이 그렇게도 부당한 시절의 파고를 넘어오면서 씹었던 자신의 살 맛이며 피맛이다. 좋은 맛은 없다. 청춘이 흘리고 간 시간의 맛. 내가 먹고 있는 이 비루한 연탄구이는 그 시절에는 수다도 허세도 제법 곁들이면서 먹던 맛이다.  진수성찬은 긴장 속에 경험하고 이름만 외우지만 우리의 맛은 입술도 기억하고 젓가락을 잡던 그 손도 기억한다. 1998년 홍대 앞 껍데기는 그렇게도 뜨거운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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