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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Sep 10. 2023

김우섭 산부인과와 주꾸미

용두동 이야기

나는 김우섭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지하철 1호선이 생기던 그즈음, 아니 연표상으로 보면 거의 동갑내기 일 것이다.

내가 1976년 , 지하철 1호선이 1974년.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곳 제기역 앞 2층(내가 태어났을 때도 2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김우섭 산부인과.


제기역에서 골목을 따라 주택가로 내려오면 단층 개량 한옥집들이 단출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래도 이 동네에서 개량 한옥집이면 계급적으로 우위에 있는 집이다. 조금만 좌우 처마길 따라 나가보면 개천가에 문을 맞대고 있는 판자촌이 용두동의 겉모습이다. 그나마 나은 곳이다. 개량 한옥집 마당 있는 단칸방.

아버지는 개인택시를 막 시작했고, 어린 시절 바지를 못 입고 깨벗고 있는 사진 몇 장에서 추론한 바, 그래도 좀 살만한 집이었다. 드르륵 하는 장식장을 열면 티브이가, 아버지가 아끼던 카메라가 몇 대, 당시 흔치 않던 전축까지 있었다. 어린 시절 용두동은 해 잘 드는 만큼 부유한 곳이었다. 물론 길가를 좀 나아가보면 개천가, 연탄재와 쓰레기 죽은 쥐가 어우러져 개울가로 흘러내리는 곳. 냄새가 덜난 물길에서 물장난을 하고 노는 아이들. 죽은 쥐가 내려오면 작대기로 밀어내고  연탄재를 부숴 작은 댐을 만들어 물길을 바꿨다. 그리고 저쪽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움막의 처녀. 그래! 지금 생각해 봐도 그렇게 나이 많은 여자는 아니었다. 중년을 지나 초로의 나이로 가고 있는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앳된 , 그러나 움막이니까 남루한 여자. 그런 여자가 다리 밑에서 아이들을 지켜봤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죽은 쥐를 던지고 연탄재를 던지면 여자는 피했다. 다리 밑은 어두웠고 그 길 따라 올라가면 홍릉 길이다. 먼 곳까지 여자를 쫓아낼 심산은 아니었으니 대략 다리 밑 움막 근처에서 던지고 괴롭히는 것을 멈추기로 한다.  그 다리 위는 미도파. 이 동네는 진기했다. 개천가 위에 백화점이 있다. 미도파는 엄마를 따라 몇 번 가봤다. 엘칸토 구두를 사러 말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미주 아파트, 용두동은 세련된 한옥에 근사한 한의원도 몇 군데, 저쪽 사거리로 나가면 박카스 파는 동화제약. 그리고 정신병원, 그 길을 건너면 용두국민학교. 그렇게 여러 가지 있을법한 것들이 눈 돌리면 다 있는 동네였다. 우리 집이 잘살았으니까 내 기억에 용두동은 잘 사는 동네였다. 단 하나 죽은 쥐와 연탄재가 있는 개천은 빼고 말이다. 개천가에서 몇 번 아이들에 의해 물가로 던져지고 흙벽을 기어올라온 것은 여즉까지 말하지 않은 추억이다. 패배의 추억이면서 , 도덕의 경계로 , 더러움의 1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러운 기억과 경험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용두동에서 제기동 찻길가. 공장들이다. 모두들 쇠를 자르고 쇠를 굽고, 쇠를 꺾는다. 선반, 밀링, 여러 영어단어가 섞인 그리고 그 영어를 한글로 써 놓은 공장들이 크지도 않게 한 칸씩,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나가면 쇠 용접하는 냄새가 그렇게도 구수했다. 용접냄새는 쥐포 끝자락 냄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용접하는 쇠 냄새가 아니라 용접봉으로 쓰는 마그네슘이나 납들이 타는 냄새가 그러했다. 납공장에서 살아 그런가. 거부감 없다.

용두동부터 신설동까지 그러다가 고가차도를 만나면 그곳은 주산 부기부터 온갖 취업 재수 학원이 몰려있는 곳. 신당동에서 넘어오는 버스가 이 도로를 지날 때 늘 생각나는 광고가 있었다. 무려 티브이에서 일요일 운동회 예능 전에 나오던 "재수 없는 신설동 학원" 광고. 나중에 버스에도 나오더라. 물론 고가차도가 사라지면서 광고도 사라졌다. 학원 다니던 사람들은 아마 직장을 은퇴했겠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러니까 지금 보다 약 10년 전, 아버지와 마지막 만날 때 즈음인가. 용두동을 지나가고 있을 때다. 제기역 앞 현수막 " 용두동 주꾸미 축제"  아버지가 물었다.

"용두동에 무슨 주꾸미 축제냐? 여기가 서해도 아니고"

" 저 골목에 있는 주꾸미 집들이 원조 맛집이라는 데요? 한 사십 년 되었다고. (당시 내 나이가 38살) "

"너 태어났을 때보다 오래되었으면 내가 모를 수 없잖아. 아니 너무 억지 아닌가"

"머 큰일도 아닌데요. 얼추 맞네요 머. 주꾸미집이 그때부터 있었을까요?"

"아니 , 아마 내 기억에는 여기가 앞에 밀링 집들이 많잖아. 전부 공장들이니까 저녁에 끝나고 소주 한잔 먹는 게 다였을 거야. 그때는 머 실비집 한 두 군데 있었지. 그게 아마 저 집 같은데?"


실비집이었을 것이고, 이름도 그렇게 바뀌어 왔고. 동네 길가 실비집이 밀링머신과 함께 나이 먹어오면서 다행히도 유랑민 되지 않고 남았다. 살아남는데 선의가 어디 있고, 정갈한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게 주꾸미면 어떻고 꽁치면 어떤가. 하루종일 눈에 개아리 나는 사람들이 하루저녁 그 독한 소주로 5촉 전구 밑에서 눈도 닦고 눈물도 닦고 먼지도 토하고 하루도 토하면 그게 위로고 선의지. 게다가 이름도 기억하기 좋게 나정순이라고 가나다라 중 두 번째 정도로 쉬이 정해주셨고  주꾸미 아닌가. 무엇을 넣어도 자기 모습 잘 지키는 그런 순한 안주가 어디 있는가. 남아있어 고마운 것이지.


나는 김우섭 산부인과를 다시 가본 적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내 의지로 방문하지 않았을 그때 이후, 5년 후 내 동생이 태어났을 때 말이다. 산부인과 간 날은 기억나지 않는데 , 그날 저녁 아버지가 해준 그 초라하고 서툰 저녁밥은 기억난다. 그러니 그날은 어찌 되었건 기억에 남아있다. 선후관계는 조금 달라도 말이다.

김우섭 산부인과는 사라졌다. 은퇴만 하신 게 아니라 2006년 부고 기사를 찾았으니 , 대략 그즈음이다. 나정순 실비집을 필두로 한 그 동네 주꾸미 집들이 용두동 원조 축제를 시작한 그즈음. 


며칠 전, 가게에 오신 노령의 할머님의 질문. "여기서 나가서 동대문 여중을 가려면 어떻게 가나?"

설명하기 참 어려웠다.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는 요즘의 문제가 아니다. 

"아 그러니까 여기 래미안을 건너가셔서 저쪽 래미안을 지나시면 오른쪽에 래미안힐스테이트가 나오는데요 새로 짓는 래미안 옆이 그곳이에요 학교"

설명 참 망조다. 래미안을 건너 래미안을 지나 래미안을 끼고돌면 새로 짓는 래미안이 나온다니 말이다.

"내가 용두동에서 50년을 넘게 살았는데 다 새로 짓고 아파트 밖에 없어 , 그래서 길을 몰라"

" 아! 용두동이요. 저도 용두동에서 태어났어요. 그 제기역 앞. 산부인과"

"아! 김우섭 산부인과"

"네 맞아요 김우섭 산부인과"


기억을 잘 찾아보니, 개량 한옥도, 그 마당도 , 스카이 콩콩도 , 장독대도, 동화약품 박카스도, 정신병원도 , 

그리고 썩은 개천도 , 미도파도  그렇게 많은 단어들을 잘 쌓아놓고 동네 골목 구석구석에 남겨놓았다.

래미안 사이사이에 나처럼 , 아니 50년 저 어르신처럼 이제 도시를 위로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동네 입구에 있던 그 산부인과 교집합. 원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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