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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에서본시인 May 22. 2023

전시

순간의 유희를 위한 가상의 문화활동

얼리버드로 구매했다던 전시회 티켓은 기간한정으로 판매도 되었지만, 할인된 가격의 특혜만큼 적절한 형평성을 위해 제한된 날짜 안에 관람을 마칠 것을 종용했다. 단순히 생존한 작가가운데 가장 판매가가 높다고 하는 저명한 작가의 이름이 그 자체로 전시의 타이틀이 된 탓에, 까다로운 나의 전시취향을 저격하고자 친구는 무조건 전시 이름만 확인하고는 본인의 재빠른 티켓구매를 뿌듯해했다. 우리는 대충 전시가 언제 정도 시작하고 끝난다는 일정은 알고 있었으나, 너무 이른 얼리버드의 조건상 티켓구매 당시에는 달력의 숫자가 너무 먼 미래처럼 보였기에 금세 그 일정은 잊혔다. 시간의 관성을 애써 무시한 채로 지내온 날들을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득도 없다는 걸 극히 잘 알면서도 우리는 판매처에서 세심하게 안내해 준 문자 메시지로 다음 주에 당신이 발권한 티켓이 소멸될 것이라는 경고장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주말밖에 시간이 나지 않았으므로 기필코 다음 주말에는 전시장을 방문해야겠다는 (아무리 얼리버드라는 50% 가격할인을 이용하더라도 이 또한 손해 볼 수 없다) 결심으로 한 주를 달랬다. 느지막하니 아침인지 점심인지 구분되지 않는 첫 끼니를 해치우고 어차피 주말에 붐빌 사람으로 가득한 전시장을 목표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따사로운 햇살과 살랑거라는 바람이 그 말도 안 되는 여왕설의 군주제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신하가 되어 마냥 사뿐거리게 만드는 주말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했다. 전시장은 접근성이 좋은 탓인지 홍보를 많이 한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기대이상으로 북적였다. 온라인 예매를 한 고객은 구태여 지류 티켓으로 변경해서 입장을 하라는 친환경적이지 않은 규칙에 입 다물고 나는 미리 앞서서 기다리고 있던 매표소의 사람들의 뒷꼬리에 줄을 섰다. (어찌나 사람들이 이 점에 관해 많이 문의했던지 덕지덕지 입구에 ‘입장 시에 지류티켓’이라고 분명하게 손글씨로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저명한 작가의 이름이 타이틀로 범벅된 것과는 무색하게 전시의 목적은 그의 친구와(과연 그 작가와 친분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동세대를 이끈 한 화조를 소개하는 전시로, 내 감상으로는 거장의 유명세를 잠시 그럴듯하게 빌려온 (거장의 대표작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기대조차 하지 말기를) 가장행렬 같았다. 전시는 영국 나라를 대표하는 한 작가를 이름으로 내세우면서 너무나도 한국 감성으로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점 남기고 싶어 하는 관람객의 욕망을 한 껏 건들며 여기저기에서 터트리는 찰칵 소리의 리듬과 함께 완성되어야 할 예술처럼 보였다. 관람객은 예술적인 주말을 향유했다는 자만감을 뽐낼 배경 도구로 전락해버린 전시장의 멋들어진 싸구려를 배경으로 연신 미소 지으며 그들도 생전 처음 들어본 작가의 이름 앞에서 그럴듯한 문화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뿌듯해하는 문화생활로 둔갑한 마법 같은 환상이 가득한 공간에 갑자기 떨어진 것만 같은 나는 불만 불평만 가득한 투덜이가 되어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가당치 않은 시끄러운 시각 소음을 어떻게 해석하면 나도 그들과 같은 문화생활을 남길 수 있을지 연신 불안에 떨며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사방이 거울에 비친 닭장 같은 공간에서 나도 사진을 찍었다)

사실 전시가 사람들에게 유희의 도구로 잠시 즐기고 사라지는 탄산음료의 상쾌한 기억처럼 남는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가공음료 같은 합성착향료를 주원료를 쓰면서 원재료의 풍미를 그대로 한 것 같은 착각을 전달하는 전시 주체자의 뻔뻔함을 애써 모른 척한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바나나우유’와 ‘바나나맛 우유’의 차이와 같다. (나는 어떠한 바나나도 사랑한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것은 개인의 기호이기에 무엇도 문제 될 부분이 없다. 다만 과일맛이 과일 자체를 가장한 채 본인이 전부를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발생한다. 그들은 전시 마지막 벽면에 ‘한영수교 140주년 기념’이라는 의제를 건드리며, 그들 전시의 정당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이것은 마치 원조맛집을 시끄럽게 자칭하는 모호한 훈장처럼 어느 누구도 진위를 건드릴 수 없다는 가정하에 스스로의 자격미달을 인정하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이렇게 마지막 공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정당성을 가져다 붙이지 않으면 불안한 그들 전시의 위엄에 흔들림이 틀림없이 가해질 것을 우려하여 사전조치한 것이다) 이것은 관객들이 미연에 의문점을 갖기 전에 선두로 호기심을 막아버리는 행위이다. 전시를 그럴듯하게 교묘하게 가공한다는 점은 위험하다 못해 우려스럽다. 위작은 아니지만 단순히 프린트한 종이를 액자에 끼워 넣고 훌륭한 작품처럼 원색의 벽면에 걸어둔다고 해서 그게 멋들어진 작품인가? 캔버스에 접착해 붙인 시트지 한 장을 마치 직접 캔버스에 그린 작품처럼 눈속임하는 것을 관객들은 모를 줄 아나? 네온 글자로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과 그럴듯하게 한 줄 요약해 버린 작가의 명언 아닌 어록이 관객의 감성을 훔치며 가볍게 치장할 오늘의 철학을 알코올처럼 금세 공기 중으로 날려버린다. (실제 작가가 그 말을 했는지 아닌지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영화를 보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영상 플랫폼을 통해 줄거리를 몇 분만의 요약본으로 보는 세대에게는 이러한 겉핥기식 관람이 하나의 모색으로 정착되었는지도 모른다. 전시 쇼케이스 안애는 관련 도록을 판매한다는 황당한 광고판과 함께 작품의 캡션보다 큰 가격표가 나란히 병기되어 있는 획기적인 컬처쇼크를 만끽할 수 있다. 가격표에는 누가 구매할 것인지 의문인 미친 숫자가 나열되어 있고, 전시장을 빠져나가는 통로에 더욱 다가갈수록 이 전시의 주제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물을 수밖에 없는데, 자상하게도 주최 측은 ‘한영 수교 100주년’이라는 나름의 목적성과 분명한 근거를 거들먹거리며 이 얼토당토 하지 않은 기획전의 의의를 되새기게 만들었다. 아마 타이틀에 올려진 작가는 본인 이름으로 이런 전시가 한국의 심장부에서 열린다는 사실이 (인지하고 있을지 조차 모르겠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말의 티끌만큼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같이 간 친구는 이 전시가 나와는 상당히 상반되게 흡족스럽고 전시 기획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의 감성이 부끄럽게도 민망하게 나는 그의 전시초대에 대한 예의도 생각하지 않고서 불쾌한 기분만 내비쳤다. 나는 내 의견을 피력해 보았자 소수의견에 그칠 개념 없는 자만심에 이상하리라만큼 자신감을 내비친다. 예술은 무엇인가 향유되는 것보다 즐기고 감상하는 관람객의 입장 안에서 다채롭게 존재하는 것일까 하고 알 수 없는 그 공간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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