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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에서본시인 Jun 26. 2023

[모리모토 쇼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사람

트위터 팔로워 폴로어 25만 명의 신종 대여 서비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대여하는 서비스가 있다며 세계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나고 있다는 기삿거리로 다뤄진 뉴스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역시나 그 대상은 일본이었고 일본은 왜 이렇게도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곳인지 의아해하며 분명 시청자들도 그런 선입견에 확증을 더하는 느낌으로 작성된 뉴스였다. 화제를 주목하게 만드는 거창한 주제거리로 화려하게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정말인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된 사람이 되어 자신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우스갯소리로 비즈니스관계로 얽힌 약간의 거리감 있는 회사동료와 잡담을 나누기에 딱 알맞은 주제가 아닌가 했다. ‘있잖아요. 일본에는 그런게 있대요’라면서 운을 띄우며. 

근데 그 사람이 책을 낸 사실을 알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책도 낼 수 있나 하며 웃음거리로 넘길 수도 있겠으나, 무료한 주말의 오후를 채우기에 이 정도 두께의(실제로 손에 잡기 편한 사이즈의 슬림한 두께의 판형) 알맞은 책도 없어 보였다. 읽다가 흥미가 없으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니까. 저자에 대한 죄책감 따윈 없어 보이는 이유도 한 몫했다. 


책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콘셉트로 만들어졌는데, 그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면 작가는 글을 쓰지 않았다. 편집자가 질문을 하면 그것에 답하는 조건으로 책이 구성되었고, 생각과 글은 결국 작가의 본인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지만 글로 기록되고 문자로 인쇄된 것은 결코 작가가 하지 않은 일이었다. 책에서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의 기준이 계속해서 모호하게 제시되는데 (심지어 작가 본인도 잘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준은 있다)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의 영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며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는 모호한 입장을, 관대한 관점에서는 유동성이 있는 자세를 취하며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학을 펼친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가 이렇게 까지 확장되며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때문에 이 책에서 입 밖으로 질문을 통해 나온 대답이 구체화되면서 자신의 기준이 정리되는 인상을 받았다며 스스로가 신기해했다. (이것은 또 다른 발견!)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작가 스스로가 출발한 이념이기에 그가 어떤 기준을 제시하든 그것은 자신 맘에 따른 일이지, 누군가가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는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작가는 조금의 타협의 여지가 없다) 무료로 시간을 렌털하며 자신을 대여하여 사용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결코 봉사활동도 아니며(사용자는 왕복 교통비와, 렌털에 부가되는 비용일 일체 지불해야 한다)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보람 있는 활동도 아니라고 말한다. (누군가 작가에게 돈을 주기를 원하면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트위터라는 플랫폼을 통해 의뢰와 사연, 후기를 기록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본인을 이끌어 내었으며 작가는 그 공간이 연극을 위한 무대이며, 관객들은 서로를 바라볼 수 있고 누군가가 자진해서 자신을 렌털하기 원한다면 그 무대의 주인공이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작가는 이러한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을 통해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인 삶의 인간을 부정하고 시니컬하게 비꼬려고 했다. (작가 본인이 분명하게 그런 의도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표현으로 시사하였다) 개인적인 가정사에서 비롯된 이유도 있겠지만 자신이 사회에 소속되면서 강압적으로 강요된 위치와 효율성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배경으로 과연 본인 자신이 무엇의 쓸모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에 관한 철학이 앞서있다. 배우자도 아이도 있으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를 벗어던지고 시간을 할애하는 무료한 활동은 타인이 지정한 규칙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때문에 능력주의로 점쳐지는 현대 사회에서 작가가 주목을 받으며 세상의 이목이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유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과관계이다. 나는 사실 가십거리로 존재할 법한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통해 만나본 작가는 가십거리로 넘기기에 너무나도 깊은 자아 성찰과 고민이 가득해 단순히 작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내 모습 혹은 누군가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고민거리를 대신 이야기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것은 결코 한 때의 뉴스거리로 치부해버릴 문제가 아님을 알게 해 준다. 

누구도 존재 자체로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작가는 쓸모없다는 낙인으로 기억된 본인의 사회생활에서 오히려 반기를 들며 나섰다. 나는 존재 자체로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지정하고 개척하려는 시도가 다소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처럼 여겨지는 사회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는 정말인지 진지했다. 그 진심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결코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얘기가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이야기해 줄 수 있을 실마리처럼 보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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