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동안 학교 다니고 1년동안 놀았습니다
나는 내향성 인간이다. 내향성 인간이라고 모두 집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집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년제 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나보다. 집을 너무 좋아해서. 편하라고.
어찌됐든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돌이켜보면 중학교도 짧았고 고등학교도 짧았으며 대학교는 그보다 배는 짧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그 흔한 휴학 한 번 안하고 다녔더니 의문의 손님이 와버렸다. 모두가 질린다 질린다 이야기하는 코로나다. 비행기는 더 이상 사람을 싣지 않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다. 내 인생에 비바람이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내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이걸 어쩌지? 일본어 학과를 나왔는데 비행기 편이 막히니 취업 길도 막혔다. 교수님과는 연락이 잘 닿지 않고 닿아보았자 영양가 있는 회사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다.
결국 나는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몇 가지에 도전했다. 그 중에선 좋게 끝난 것도 있었고 잘 끝나지 못한채 어영부영 흘러간 것도 있다. 잘 끝난 것은 자격증 따기이며 잘 끝내지 못한 것은 취업이다. 그 두개가 차라리 반대가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국민지원금으로 디자인 학원을 반 년동안 다녔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반 년. 디자인을 전반적으로 새로 배우니 색달랐다. 내가 그동안 했던 포토샵은 포토샵의 '샵' 뿐이었다!
그 사이에 자격증도 세 개나 땄다. 반 년의 세 개. 적어도 내겐 성공적인 성취인건 확실했다. JLPT는 자격증서가 나오긴 하지만 자격증이라는 느낌이 없다. 그러나 기능사 자격증은 달랐다. 손에 만져지는 사각형의 얇은 카드. 너는 착실히 나아간다 전달하는 감각이 좋았다.
수업은 고됐다. 마스크를 쓰고 하루에 여덟 시간 컴퓨터 앞에 있으면 등도 아프고 눈도 지끈거린다. 다행인 점은 게임을 통해 얻은게 전혀 없는 건 아니란 점이다. 타자 하나는 빨랐으니 입력 속도가 좋았다. 뭐든 빨리 완성했고 뭐든 빨리 적응했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이야기 아닌가?
학교가 있으면 반 친구가 있듯 학원이 있으면 학우가 있기 마련이다. 나와 선배는 바로 옆자리라 말이 텄고 식사도 함께 했다. 학우분은 인생의 선배라 부를만한 인물이었다. 늘 좋은 말을 해주었으며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내향성인 나도 그 선배와 대화할 때는 외향성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잘할 수 있어요, 아직 어리신걸요. 미래가 창창한대요? 응원할게요. 어디서든 잘 해내실 거예요."
마지막에 헤어지기까지 들었던 말.
참 감사합니다.
선배도 어디서든 잘 해내실 거예요.
그런데 이걸 어떡하지.
잘 안되기 시작했다.
지원금으로 다녔던만큼 끝나자마자 나는 상담사 앞에 앉았다. 자세한 설명을 전해듣고 그로부터 반 년간 취직을 준비하기로 했다.
처음 한 달은 설렁설렁. 잡코리아와 사람인을 오고 갔다. 음. 여긴 집과 너무 멀어. 음, 여긴 PPT 디자인까지 시키네? 음. 여긴 원화 디자이너를 구하는구나, 안되겠다….
초중고를 집에서 10분 거리로 다닌만큼 대학생활의 가장 큰 단점은 거리였다. 2시간씩 걸리는 대학교에 꼬박꼬박 나가다보면 교통비가 티끌모아 태산. 그러니까 안좋은 의미로 십시일반 된다. 더불어 그놈의 저혈압 때문에 자주 쓰러졌는데 집에서 일은 못해도 근처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취준 생활은 불운하게도 코로나 경기로 한 차례 휘청인다. 안그래도 적은 숫자 중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모래사장에 바늘 찾는 기분으로 뒤적였다.
중소기업 중에는 연봉도 제대로 적어놓지 않은 곳이 많다. 그래도 집과 가까우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연락 넣어봤다. 일년에 천팔백인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어떻게 먹고 살라 싶을 정도로 급여가 짠 곳이었다. 심지어 삼천이라 적어놓은 곳은 경력이 없으니 이렇게 하자며 수습기간 때 이천오백으로 줄여 부르기도 했다.
남의 돈 받고 사는게 그럼 쉬운 줄 알아?
사회에 나오면 힘들다고 했다. 그 중 회사 생활은 익숙해져도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입사하기 전부터 미친듯이 고통스러웠다. 내 안의 자존심과 의지가 조금씩 회사라는 풍파에 깎였다. 들어간 곳도 수습기간 내에 내쫓기듯 나오거나 도망치듯 나왔던지라 이력서 한 줄 적기도 힘들었다.
면접을 보고 회사를 하루 이틀 다니다 일주일이 넘기 전에 퇴사하고. 그러다 머리카락 채로 퇴근 지하철에 낑겨 돌아온다. 당장 돈이 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급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통장에 턱턱 쌓여가는 돈이 필요했다.
결국 미지근한 불을 발등에 달고 내 나이가 올해 몇이며 삼십세부터는 이력서 통과도 어려워진다는 충고를 듣는다. 고맙지 않은 충고다. 집에서는 달달달 나를 볶아낸다. 마지막에는 응원으로 끝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어딘가는 뽑아주겠지.'
나 말고 세상에는 취준생이 참 많을 것이며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나 하나 뽑아줄 회사 없겠느냐고. 그렇게 삼킨 불안은 사회의 시선과 함께 뒤섞여 착실히 우울증과 자기혐오, 더 나아가 자격지심이 되었다.
우울증이 쌓일수록 나는 오히려 열심히 했다. 당장 이 우울증을 끊어내줄 무언가의 작업을 찾았고 포트폴리오도 여러번 뜯어고쳤다. 그러고도 1차 서류에서 불합하면 내가 가진 나머지 재능을 발굴하려 들었다. 자기계발을 위해 사이트를 전전하였다가 다시금 포기했다. 그러니까, 자기계발은, 당연히도 돈이 든다. 부자는 더더욱 화려한 스펙을 가지고 거지는 스펙 한 줄 없다는 친구의 투정이 어디서 나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난 거지였다, 젠장.
밤에는 불안해서 잠도 못잤다. 갑자기 덥고 갑자기 추웠다. 이십대에 갱년기가 왔다고 다이어리에 적다가 눈물이 터졌다. 왜 터졌는지 나도 모르겠어서 휴지로 박박 닦는데 다음날 전화가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차로 이십 분 거리의 직장. 내가 지원한 곳과 딱 맞았으며 월급도 초봉치고 강하다. 나는 동생의 정장을 빌려 입고 면접을 보았고 합격했다. 행복했다. 집에와서 밥을 먹는데 그날 저녁은 아주 술술 잘 넘어갔다. 드디어 나도 사회의 일원으로 가치를 찾았다는 정신적 포만감에 취해 정말 행복했다.
잠들기 직전까지는.
모든 우울은 밤에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다정하지 않다. 괜찮을거야, 라는 자기암시를 박살낸다. 분명 그 회사는 나한테 안맞을 거라고. 나는 사회초년생이고 알고 있는 회사 전문 용어가 없기 때문에 멍청한 신입, 사회초년생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합격 통지를 받기 전보다 온화했다. 다행히 새벽 동이 떠오르기 전에 나는 잘 수 있었다. 꿈에서 나는 총을 들고 있었는데 이 총에는 한가지 규칙이 있었다. 내가 그 총을 주변 사람에게 쏘지 않으면 내 자신에게 총알을 모두 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변에 난사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에게 소중한 우리집 애완묘가 날 올려봤다.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출근해야지. 신입이니 먼저 공장부터 견학하라며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로 출근했다. 아침 지하철은 최악이었으며 급하게 나와 먹지 못한 배는 꼬르륵 댔고. 가방 속에 챙겨온 공책은 은근 무거웠다.
'나는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그 날 바로 퇴사했다.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겠다만 몇 가지 연유를 서술하겠다.
나는 출근 첫날 8시에 퇴근했으며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왔다. 어머니가 말했다. 돈을 많이 주는 곳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다시 한 번 찾아보라고.
그렇지만 나는 너무 많이 낡았다. 한 것도 없는데. 이력서에는 한 줄 뭐 남은게 없는데 나는 그 사이에 낡았다. 비에 젖은 휴지처럼 방 안에 틀어박혔다.
사회초년생은 다들 이런건가요. 죽겠어요, 아주 그냥. 오냐오냐 키워진 걸까요. 온실 속 화초였던 걸까요.
출근 축하해준다 이야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못하겠어요. 정장은 저에게 너무 무겁네요.
유튜브에서 괜히 이십대 자살률이 50%가 넘는다 이야기한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 어리석게도 충동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나에겐 그래도 최소한의 능력이 있었으나 마음이 나약했다고. 그리 생각하면서.
비관적인 생각이 가슴을 좀먹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름을 버티고 여름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여름에 제주도에 가고 싶었다. 입에는 아이스티를 머금고 시원한 반팔티를 입은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싶었다.
나는 서브컬쳐를 좋아한다. 흔히 말하는 웹소설, 웹툰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라노벨, 동인계 게임같은 걸 즐긴다. 그래서 학과도 그런 쪽으로 선택한 것이고.
한 때는 그림을 즐기긴 했으나 그림은 늘 오래 그리지 못했다. 한 시간만 그려도 벌써 피곤하고 졸려웠다. 반면 글은 의외로 앉은 자리에서 뚝딱 썼다. 적어도 하루에 만 자씩은 능히 쓸 수 있었고 대체로 2차 창작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2차 창작은 같은 장르를 파는 같은 오타쿠들을 즐겁게 만들었고 칭찬을 자주 들었다. 비방도 종종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칭찬에 나는 스며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웹소설을 읽다가 번뜩 생각했다. 아, 이런 소설은 없을까? 왜, 잘 들어보라. 허약한 드래곤이 세계를 구하는 주인공과 만나는 내용이라던지. 무협 같은 경우에는 천하제일의 여인이 극심한 남자 혐오증이라던지. 그런 설정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포털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글은 내 자신을 바라보는 투명한 거울임과 동시에 즐거운 놀이법이었다. 나에게 유배된 선비의 영혼이라도 깃들었는지 미친듯이 글을 썼고 한 달 만에 십만자라는 나름의 쾌거도 이루었다.
그리고 메일이 왔다.
출판 제안 메일이었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게 투잡으로 하는 겸업작가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 무직. 전문 용어로 백수.
소설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겼으며 여름, 제주도 바다 여행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으로 나는 내가 만들어낸 제임스(가명)를 사랑했다.
이 아이의 이야기, 마지막을 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전업작가라 이름 붙이기도 뭐한, 출판사와 계약한 백수가 됐다.
그냥 백수이지만 이제는 앞에 다른 칭호가 붙었다.
적어도 이게 악몽을 쫓는 방패가 되어준다. 하루종일 타자를 두드리다가 하품을 쩌억하고 이불에 기어 들어가면 정신적 안정감이 든다.
연락 이메일에서 오는 소속감.
개인적인 시간에서 오는 안정감.
그리고 내가 오늘도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평안.
그래서 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사실 아직 불안하다. 잘될거라는 확신도 없고 아직 중반 부분도 완결을 내지 못했으니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선인세 들어온 것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적어도 이번 여름 제주도 여름 바다는 보게 되었으니까.
완결고를 전달하고 소설이 조금 더 잘 팔린다면 일본으로 여행 갈까한다. 제임스가 벌어다준 돈이다. 그리고 제임스는 내가 키운 아이가 되었다. 제임스와 나. 그리고 해외 여행. 그 모든 어감은 여전히 바스락거리며 내 입안에서 맴돈다.
스타트 선이란 없었다. 목적지도 없고 사실 나는 눈을 감은채 골목 사이를 배회하는 중이다.
어쩌면 나는 작가 생활이라는 방황을 하다가 다시금 엉덩이를 걷어차여 어느 회사에 꽂혀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또 그때만의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나는 되도록 전업 작가로 살고 싶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일을 겸업으로 잡아도 회사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는 너무 딱딱했고 나는 물렁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