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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보는 세상

여섯 개의 점

by 예쁨


11월 4일은 ‘점자(點字)의 날’이다.



-점자란?

지면 위에 도드라진 점(가로 2점, 세로 3점)을 손가락으로 만져서 읽는 시각장애인용 문자다.


-점자의 시작

점자는 1824년 파리 맹학교에 재학 중이던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에 의해 시작되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그는 밤에도 군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고안된 ‘야간문자’를 접하면서 이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지만, 문자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등한시되었다.

오랜 시간 탄압을 이겨내고, 보완하고 수정하기를 여러 해 1853년 파리 맹학교는 결국 30년 만에 시각장애인의 문자로 공인한다.

점자의 보급과 사용법에 대해 알리려 노력했던 그는 1852년 결핵으로 사망했고, 끝내 점자가 문자로 공인받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훈맹정음(訓盲正音)창시자

지금의 한글 점자를 창안한 사람은 송암(松庵) 박두성 선생(1894~1963)이다.

당시 조선의 시각장애인들은 외국 점자나 일본식 점자를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글의 음운 체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고, 당시 학생들은 일본 점자로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박두성 선생은 오랜 연구 끝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본떠 만든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는 한글 점자를 완성했다.

이 점자는 자음과 모음을 각각 여섯 개의 점으로 표시하고, 한글의 구조적 원리를 반영해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시각장애인들도 한글을 스스로 배우고, 읽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명실상부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었다.



실명한 이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먼 데다 벙어리까지 되란 말이오?






내 직업은 <장애인 활동지원사>다.

나의 동행인은 빛과 어둠을 구분할 수 없는 중증 시각장애인이지만 그녀는 훌륭한 실력파 성악 전공자다.

그녀는 전공 외에도 피아노, 첼로, 오르간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안다.

음계를 본 적 없고, 악보를 보지 못해도 소리로 듣고 손가락 감각으로 외운다.

배우는 데 있어서는 거침없는 그녀지만 종종 어려움에 부딪히곤 한다.

어느덧 2년째 그녀와 함께 학교를 오가고 있기에 가까이에서 간접 경험을 하며 덩달아 답답할 때가 있다.

점자 표기된 포스터 / 장애인을 위한 식권 발급기

학교 게시판에는 다양한 포스터들이 게시된다.

보통은 내가 읽어주지만, 너무 많은 양이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시물은 못 본 척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점자가 표기된 포스터를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읽어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게 읽는 그녀, 알고 보니 띄어쓰기가 잘못되어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이건 장족의 발전이었다.

틀린 점자였지만 반가운 변화에 그녀도 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하는 일이 많아지길 바란다.

차라리 나서서 도와주는 일이 더 편하고 빠를 때가 많지만, 다소 불편하고 오래 걸려도 그녀에게 직접 해보게 한다.

하지만 터치식 키오스크를 사용해야 하는 식권 발급은 늘 내가 해주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식당에 장애인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식권발급기가 생겼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사용하기 용이하도록 위치 변경과 도움 기능이 추가되었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글자 확대 기능과 음성안내 시스템도 있었지만 시끄러운 식당 안에서 음성안내를 받기란 쉽지 않다.

이어폰을 꽂고 들어도 되지만 C타입도 아니고, 동그란 단자다. (아오…)

어쩔 도리가 있을 수도 있잖아?

학교에 배치된 모든 정수기에는 점자표기가 전혀 없었다.

점자 표기가 없는 건 차라리 그러려니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애인학생지원센터’에 비치된 정수기 위로 새겨진 점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수기에 새겨진 점자는 순 엉터리였다.

온수에는 (ㅂ,얼)이라고 적혀있고, 냉수에는 (ㄴ,ㅡ,ㅡ ,사)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차라리 오타였다면 덜 화가 났을까?

아니다, 냉수 자리에 온수 점자가 온수 자리에 냉수 점자가 있었다면 더 큰 사고였겠지.

학교 문제가 아니었다. 공장에서부터 정수기에 박혀 나온 제품이므로 당장 정수기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직원은 그런 불편사항으로 접수가 잦다고 했다. 본인들도 알고 있는 과오였지만 현재 어쩔 도리가 없다는 정도의 안내였다.

미안한 마음보다는 어쩌라는 것이냐의 태도에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지만, 결론은 늘 그렇듯 직원의 말처럼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동화책 점자 번역 때 유용하게 썼던 휴대용 점자 인쇄기로 스티커를 부착하고, 내친김에 동행인이 자주 가는 층 정수기에도 붙였다.

처음 음료수 자판기를 사용하며 즐거워하던 동행인.

그녀는 편의점에서 사 먹는 것보다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자판기를 신기하고 편하게 생각했다.

편의점에서는 점자표기가 되어있어도 음료의 정확한 명칭이 적혀있지 않아 구분이 어렵다.

예를 들면 ‘음료’, ‘탄산’ 정도만 적혀있기 때문에 콜라인지 사이다인지, 포도주스인지 딸기주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자판기 음료수 뽑기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품절 표시는 빨간 점등으로만 보여주므로 시각장애인들은 알 수 없다.

또한 이미 종류가 바뀐 음료수 자리에 점자 스티커는 예전 상품으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핫식스‘제품이 있지만 점자 표기는 ’ 포도봉봉‘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녀가 음료수 자판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잘못 된 것들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과연 수많은 점자 표기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소네 >
우리나라의 한 중소기업(힘스코리아)에서 개발한 시각장애인용 점자정보단말기
한소네로 독서중 / 내 이름(점자 스티커)

한소네는 모든 문자 정보를 입력과 출력 동시에 자동으로 점역해 준다.

묵자(보통 글자)로 만들어진 컴퓨터파일을 한소네에서 열면 곧바로 점자로 읽을 수 있다.

부담스러운 점자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고, 어디서나 짬나는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아도 된다.

수많은 음악파일, 도서 파일 등을 가지고 다니며 수업 및 이동 중에도 자주 사용하는 그야말로 동행인에게는 필수 아이템이다.

다만, 이 기기는 매우 고가다.

400만 원에서 580만 원까지 한다.

나라에서 보조기기 지원이 가능하다지만, 모두가 되는 것은 아니고 당첨이 돼야 한다고.

(제발 이런 곳에 지원 좀 넉넉히 해줘라, 시각장애인들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의 동행자는 중고거래로 200만 원 선에서 구입했다고 들었다.



눈이 닿지 않는 곳을 대신해 주는 손끝의 언어, 점자.

여섯 개의 점이 모이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이 손끝에 펼쳐진다.

누구라도 점자의 기적을 쉽게 지나치지 않기를..



by. 예쁨



장애인 인식개선 라디오 부문에 제출했던 녹음본이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점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며 영상으로 공유한다.

여러분, 훈맹정음을 아시나요?
시각장애인들이 읽고 쓰기 쉬운 6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한글점자입니다.
누구에게나 배움의 기회가 평등하듯 생활 속의 모든 기회 또한 평등해야 합니다.
단지 음료라고만 적혀있는 점자표기는 시각장애인들의 선택권을 무너뜨리고,
곳곳에 잘못 표기되어있는 점자오류는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입니다.
생활 속 올바른 점자표기,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 글, 낭독 : 예쁨 -




*이전에 발행했던 <소리로 듣는 세상> 역시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https://brunch.co.kr/@0e76dcb1975249f/90​​





우리는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피로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스펙은 취업하기 위해 필요한 이런저런 자격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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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기 위한 스펙을 쌓을 수 있을까요?


- 문학의 위로, 임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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