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는 인생

일곱 번째 인화

by 예쁨


흔적
흔적1, 흔적2
온 힘 다해 뛰어놀던 오후
다 놀지 못한 아쉬움만
걸어두고서
/
얍얍
범띠 주인공은 어디에


예고된 대로 따뜻한 봄날이 이어지고 있다.

한껏 가벼워진 아이들의 엉덩이도 나풀나풀 날아다닌다.

그들에게는 하교 후, 학원에 가기 전, 잠시 허락된 시간이 있다.

몸에 붙은 모든 결박을 벗어던지고 온 힘으로 뛰어노는 시간.

아이들은 이내 사라지고 보이지 않지만,

미련 묻은 물건들만 남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십 년 전 딸은 놀이터 죽순이었다.

(이제는 술집 죽순이다.)

얼마 전 딸이 물었다.


“엄마, 내가 어떻게 악어놀이터 대표가 됐는지 알아?”


하나도 안 궁금했지만,

곧이어 그녀가 놀이터 대표가 된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때 내가 뺑뺑이를 끝내주게 돌렸거든!”


악어놀이터의 메인 놀이기구는 ‘뺑뺑이’였다고 한다.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기구인데,

힘이 약한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다소 괴력적인 누군가가 잡고 돌려야 움직이는 수동적인 놀이기구다.

아하 그러니까 내 딸은 뺑뺑이를 끝내주게 돌려서 놀이터 대표를 했고,

지금은 술잔을 끝내주게 돌려서 통닭집 알바생까지 된 것이로구나.


사실은 부러웠다.

열 살짜리 아이도 끝내주게 하는 것이 하나쯤 있었다는 걸,

끝내주게 놀던 이들의 흔적은 위풍당당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끝내주게 할 수 있을까?



CCTV
누꼬?
처음 보는 얼굴인데예?

울엄마가예,
수상한 사람은예
가만히 쳐다만 보라 캐써예.


슈뢰딩거의 강아지
일광욕 중
누군가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긴긴 기다림


몇 주간 낯선 동네를 배회했다.

걷고 또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대부분의 생각들은 좋지 않은 감정으로 이어져 꼬리에 꼬리를 물어 괴롭혔다.

그때, 문득 머리 위로 강렬한 시선이 꽂혀 올려다보았다.


‘뉘신지?’


경계심 반, 어색함 반…

짖지도 않고 멀뚱히 쳐다만 보는 녀석의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반가웠다.

뛰어 올라가 안아주고 싶을 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기분 좋게 일광욕을 즐기는 강아지도 만났다.


초면입니다만,

반가웠어요.



주사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절반쯤 남은 소주
절반쯤 비워진 마음


가방 속에서 소주병이 나왔다.


친구 A,

그녀의 주사는 센척하기다.

갑자기 우먼파워를 뽐내기 시작하는데, 좀 과하다.

처음엔 옆사람 팔뚝 치기로 시작하지만,

알코올농도가 짙어지면 곧 모든 세상을 지배할 만큼의 힘이 생긴다.

평소 보다 힘이 백 배는 세지는 그녀를 잡아서 택시에 태워 보내는 일이 지상 최대 과제가 된다.


친구 B,

그녀의 주사는 헤실헤실 웃는 것으로 시작한다.

웃다 울다를 반복하는데,

특히 웃을 때 감정이 배로 넘쳐나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역시나 좀 과하다.


주사는 보통 조금 과한 감정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평소에 참고 넘기던 감정들이 그대로 튀어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내 주사는,

술병을 가져오거나 남은 안주를 쓸어 담는 것이다.

평소 먹는 욕망을 꾹꾹 눌러 참고 살다가 튀어나오는 무의식의 과잉일까?


아니다.


나는 그저 술이 아까울 뿐.

(그러니까 지난밤에도 많이 아까웠었구나.)



살거냐옹?
머리띠 한 거 아니라옹
안 살가면
가던 길 가쇼


꽃집 앞,

오색찬란한 봄꽃들이 지나가던 발길을 사로잡는다.

졸업식을 제외하면 평소 꽃을 내 돈 주고 사는 일은 극히 드문 편이지만

봄에는 자연스레 꽃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다.


꽃가게 안에는 주인보다 더 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하악질을 했다.

살 마음은 없고 구경만 하는 하릴없는 손님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던 게지.


안 살 거면 꺼지라옹~




나무가 된 고사리
고사리 나무
작은 고사리 하나가 나무가 되었네
하늘에 닿고 싶다고
달님 만나고 싶다고
나무가 되었네


고사리를 닮은 나무를 보았다.

정확한 나무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나무를 그냥 ‘고사리 나무’라 부르기로 했다.


작은 고사리 풀은 어쩌다 나무가 되었을까,

과연 어떤 마음에 닿고 싶어 저토록 커다랗게 자라났을까?




적과의 동침
in 스시집
친구 vs 원수
사랑 vs 증오
믿음 vs 의심

그래도 말이죠,
기댈 곳은 오직 당신뿐이랍니다.



by. 예쁨




그게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최고의 나야.

고통과 환희가 하나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는 듯이.

비와 천둥의 소리를 이기며 춤추듯이,

무덤가에 새로운 꽃을 또 심듯이,

생을 살고 싶어.


-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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