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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쁨 Sep 03. 2024

왜관, 아름다운 그곳

왜관 수도원

작년 여름 공지영 작가의 <높고 푸른 사다리>를 감명 깊게 읽었다.

처음엔 종교적인 느낌이 짙은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사람 간의 사랑,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커다란 존재의 사랑.

소설에 흠뻑 빠져 소희와 요한의 사랑을 응원했다가 또 얄궂은 소희를 원망했다가, 어쩔 수 없음에 아쉬웠다가.. 아픈 역사에 아린 마음을 부여잡고, 끝내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을 통해 감동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마음에 열이 오르락내리락거리다가 소설 속에 나오는 장소마저 마음에 끌렸고 가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종교가 없는 나는 책을 추천해 준 친구와 함께 왜관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KTX로 약 3시간 거리였다. 고속열차 덕분에 엄청 먼 곳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었지만 실제 거리로 따지면 서울과는 꽤 먼 곳임에 틀림없다.

왜관역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간이역이었지만, 소설 속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도원 방향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은 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경상도 더위의 매운맛을 느끼며 땀을 뻘뻘 흘리고 도착했는데 마침 수도원 앞마당 쪽이 공사 중이었다.

친구는 더 아름다운 곳인데 공사 중이라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입구에서부터 충분히 수도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것은 포클레인으로 가릴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정함 같은 것이었다.

얼떨결에 미사를 보았고, 가톨릭신자인 친구 덕분에 수사님이 준비해 주신 점심도 먹게 되었는데 소박하면서도 정갈하고 맛있는 식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후식으로 주셨던 살구 몇 알은 반가운 맛이었다. 수사님이 몇 개 더 드시라고 챙겨주신 살구를 오물오물 씹으며 햇살과 고요함에 취해 벤치에 앉아 있으니 너무 좋았다. 친구 말처럼 조용한 수도원으로 휴가를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톨릭에서는 일상을 벗어나 묵상, 성찰, 기도등 일정기간 동안 수련생활을 하는 것을 ‘피정’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손님의 집이라 일컫는 곳에 미리 예약을 하고 머무를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그 인기가 생각보다 대단하다고 했다.

은은한 종소리, 알록달록 예쁜 창, 고요함 속에 웅장함, 절로 경건해지는 마음.

무엇보다 소설 속에 장소를 직접 방문해 보고 그 여운을 느껴보는 짜릿함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어디선가 미카엘이 나타나 안내해주지 않을까, 안젤로가 나타나 특유의 맑은 미소로 반겨주지 않을까, 작은 기대도 해보면서.

지난 6월, 왜관을 다녀온 후 오랜만에 수채화를 그렸다. 그리고 수도원으로 데려가 준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다.

독학으로 배우고 내 멋대로 그리는 터라 썩 볼만한 그림은 아니지만 어떤 날- 어떤 장소- 를 기억하기에 사진이나 글보다 더 좋은 건 그림임에 틀림없다.

그림을 그릴 땐 그 대상을 오래 보면서 면밀히 관찰해야 하는데 그런 행위는 이미 사랑하거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다시 여름이 오면 조용히 왜관수도원으로 피정을 다녀오고 싶다.


by. 예쁨



사랑은 가시지 않아요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르는 거니까

슬픔도 희석되고

실은 아픔도 아팠다는 사실만 남고 잘 기억되지 않지만

사랑은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다는 것을

 

젊음아 거기 남아 있어라, 하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 언제까지나 거기 남아있어라.

그때 종소리가 울렸다.

하늘에서 푸른 밧줄로 엮은 사다리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종소리는 울렸다.


-높고 푸른 사다리 / 공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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