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을 죄악시하고 개성을 무시하는 한국 언론과 사회
오늘날 미디어와 칼럼에서 다루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남남갈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대립과 분열일 것이다. 한국사회는 대립이라는 단어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한국인에게 대립과 분열은 곧 사회의 하나 된 목소리에 대한 반기였으며, 사회 통합을 방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언론과 정치권은 우리 국민이 대립과 분열에 울렁증을 가지게 만들었다. 언론은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 사회의 대립과 분열을 부각했고, 연출했다. 정치권은 분열과 대립을 지지자들을 규합시키기 위한 절대 조건으로 인식했고 언론의 연출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국민들 머릿속에 있는 대립 트라우마는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정권‧정부마다 이용해 왔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는 정상적인 혼 운운하며 대립의 정치를 끝내고, 하나 된 국민성 신장을 위해 나아가자는 전체주의 발상으로 보일 수 있는 목적으로 국정화 교과서를 추진했다. 문재인 정부는 K-방역의 성공을 위해서는 분열이 아닌 단결된 국민의 힘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설파했다. 여권에서는 정부에게 방역의 책임을 묻는 야권 정치인들을 향해 불필요한 사회적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보이지 마라며 가열차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대립과 분열이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해악인가. 아니, 애초에 통합을 선으로, 분열을 악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이 가치판단에 대한 명쾌한 정답은 없다. 그 해답은 사람 나름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 최대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언론과 정치권이 대립은 악, 통합은 선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이분법에 갇혀 이를 국민들을 조종하는 명분으로 마음껏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사람은 각자 가지고 있는 소망도 다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다르다. 민주주의 사회는 이러한 모든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걸 전제로 해야만 존립할 수 있다. 때문에 민주사회에서 이견은 존재치 않는 완전무결한 통합이란 존재할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현상인 것이다. 시민들이 같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기 위해선 각자의 소망과 개성을 국가의 합법적 폭력을 통해 억제해야 하는데 이는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할 법한 발상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과 정치는 사회적 대립을 운운하며 ‘단결’과 ‘단합’을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와 생각을 대립과 갈등으로 치환하여 질타한다. 이러한 세뇌에 먹혀든 국민들은 정치권과 언론의 목소리에 함께 편승하여 사회 정책에 대한 이견과 불만 표출 행위를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악한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한다. 대립과 갈등을 죄악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소수의 목소리는 존재하기 힘들다. 이견과 불만을 드러내는 게 어려운 사회는 민주주의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가 없다. 이견의 대립 속에서 합의점을 찾아 나라의 운영을 결정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데, 갈등과 대립이 없고 이견이 존재치 않는다면 무슨 수로 이 시스템이 정상 작동할 수 있겠는가.
이제 갈등과 대립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대립은 악이고, 통합은 선이라는 이분법은 오히려 대립을 심화시키고 합의를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민주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이견과 불만으로 갈등이 생기고 대립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갈등이 발생하면 상황을 수습하고 어떻게 합의점을 찾을 것인가에 집중해야지, 갈등 자체를 죄악시해서는 안된다. 무균실에서 사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없듯이, 대립이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사상으로 통합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성숙할 수는 더더욱 없다. 소수의 이견과 반대의 목소리로부터 비롯되는 갈등과 분열을 자유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당연한 현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민주주의는 그 싹은 발아하고, ‘성숙’의 과정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