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끔한 인생

벌과 입술, 그리고 필러

by 망치상어


5월이 되자 하늘은 한층 더 파래졌고, 나무는 그 초록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바람은 가볍게 볼을 스치고, 옛 생각이 났다. 할머니 댁 마루에서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수박을 게걸스럽게 먹던 7살의 김지용을 아는가? 그럴 리가 없지. 하하 죄송하다.


이렇게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추억도 있지만, 떠오르는 옛이야기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무던히 지나온 잠 못 이루던 아픔의 날들이, 내 가슴에 박힌 커다란 못의 이야기도 떠오르곤 한다. 지금 여러분이 읽을 이야기는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의 추억이 담긴 못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9년 여름의 한 일요일이었다. 아버지는 집안 어르신들과-나는 이름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는 분들과-벌초하기 위해 새벽부터 부랴부랴 준비하셨고, 입시 준비에 힘써야 하는 고등학교 3학년인 나는 당연히 같이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는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공부도 안 하면서 유난스럽게 공부를 피했다. 벌초라니, 지금이야 고통을 즐기는 특이 취향으로 변해 당연히 나서겠지만 더운 데 돌아다니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고등학생의 내가 공부하기가 싫어 벌초에 나섰다는 것을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


TV에서 ‘TV 동물농장’의 오프닝 곡이 흥겹게 거실을 채울 때쯤, 베어 그릴스 뺌을 양손으로 후려칠 패션의 남성 둘이 집을 나섰다. 원래라면 ‘TV 동물농장’ 시청 이후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까지 야무지게 시청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일요일 루틴이었으나,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짜릿함을 만끽하기 위해 이 정도 도파민은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직업 특성상 건설 현장에 자주 방문해야 하시기 때문에 SUV를 고집하신다. 어린 마음에 고급 세단이나 멋진 차가 아닌 것에 가끔 심통 부리기도 했지만, 오늘은 우리 아빠 부릉이가 최고다.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묻혀 계신 선산에는 처음 가는 것이었는데, 산속으로 끝도 없이 들어갔다.



“도착했어요?”
“아니, 더 가야 해.”


“이제 도착이에요?”
“아니, 좀 더 가야 해”


“드디어 도착이에요?”
“조용히 좀 하고 걸어”



지쳐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쯤, 도착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공부에 대한 열정은 여러분의 통장 잔고와 같이 하늘로 사라졌다.


산 중턱에 도착했을 때, 휘발유 냄새가 코를 찌르고, 처음 보는 할저씨(아저씨와 할아버지의 중간쯤 되는)들께서 예초기로 풀을 베고 있었다. 늦은 만큼 열심히 하자던 아빠는 급하게 예초기를 매시고, 아직 나는 그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셨는지, 내 허리만치 오는 갈퀴를 주시며 잘린 풀을 모아 언덕 밑으로 밀라고 하셨다. 땀 뻘뻘 흘리며 풀을 모으던 나는 무의식중에 느꼈다.



‘재미있다.’



이것이 고등학교 3학년을 위한 유교문화가 유일하게 허락한 마약이 아닐까? 오래간만에 도심에서 벗어나 정신마저 그의 몸에서 벗어난 것인지, 들뜨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갈퀴는 가볍게 느껴졌고, 경쾌한 갈퀴질에 풀들은 일사불란하게 언덕 밑으로 그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언가 그를 멈춰 세웠다.


영화를 보면 꼭 중요한 순간에 주인공을 방해하는 악당이 나타난다. 그들은 주인공을 막아서며 고난과 시련을 주고, 시청자로 하여금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날도 그러했다. 언덕에 굳게 박힌 덩굴이 그의 격렬한 갈퀴질을 방해했고, 언덕 너머로 밀어버리려 했던 풀 무더기는 목에 막힌 맨밥처럼 멈춰버렸다.


악당을 마주한 주인공이 그들에게 맞서듯, 고3의 패기와 낭만 가득한 그의 갈퀴는 덩굴에 맞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덩굴을 힘차게 찔렀다.



푹.


푹..


푹...



그 순간, 덩굴 아래에서 알 수 없는 두 개의 무언가가 천천히 날아올랐다. 아뿔싸, 벌이었다. 대충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벌 두 마리가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날아올랐다. 벌은 유난히 느리게 날아오는 기분이었다. 죽기 직전에는 세상이 느리게 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런 말들을 잘 믿지 않는다.



'에이, 다 구라 아냐?'



하고 무시해 왔지만, 오늘은 달랐다. 벌들은 날카롭지만 느리게 내 눈을 향해 다가왔고, 내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 순간, 벌들은 마치 용맹한 전사 같았다. 그들의 쉼터를 공격받자, 가장 용기 있는 두 전사가 그들보다 수백 배는 커다란 괴물에게 달려든 것이 아닐까? 그들에게 나는 괴물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막대기로 자신들의 소중한 쉼터를 찔러대는 무시무시한 괴물 말이다.


벌은 움직임과 냄새에 민감해 눈, 코, 입이 있는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한다고 한다. 물론 그때는 이 사실을 몰라 제자리에 얼어버렸다. 벌들은 달콤한 데이트를 방해받은 커플처럼 내 얼굴로 무섭게 달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로 입을 가렸고, 한 마리는 내 팔뚝에, 다른 한 마리는 내 코에 붙었다. 원래 코가 큰 편이어서 시야에 코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마치 VR 기기가 내 코 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 근데 이건 현실이잖아.’


‘벌 형, 진짜 미안... 살려줘.’



벌과 아이컨택을 할 기회가 별로 없는데 이참에 벌과 진솔한 대화를 나눠볼까, 하는 고민도 잠시, 내 안면부와 팔은 공포의 고통이 밀려왔다.


천사의 입맞춤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벌의 입맞춤까지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벌이 붙어 있던 오른팔은 자기 얼굴을 후려치며 부담스러운 벌을 떼어놓으려 애썼고, 왼팔은 고생하는 왼팔을 힘차게 토닥이며 벌을 뿌리쳤다. 순식간에 내 입술과 팔은 벌의 따끔한 공격 덕분에 부어올랐고, 나는 응급실에 가기 위해 급하게 산에서 내려와 아버지의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세 배는 불어난 내 입술을 보고 충격에 빠져 급하게 차를 몰았다.


태어나 처음 벌에게 쏘인 나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병원으로 향하며 벌, 아니 별생각을 다 했다.


‘이제 죽는 건가? - 가뜩이나 친구도 별로 없는데, 그래도 몇 명한테는 인사라도 돌려야 하나? - 담임 선생님께 학교에 못 간다고 미리 말씀드릴까? - 엄마한테 사랑한다고도 못 했는데, 지금이라도 빨리 전화해야 하나? - 겨울에 어벤져스 나온다고 했는데, 못 보고 죽을 순 없어. - 날씨 좋다.’


구글에 ‘벌애 쏘였을 때’, ‘벌초하다 벌에 쏘임’과 같은 글들을 찾아보며 정보의 홍수에서 두려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할 때, 응급실에 도착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차에서 내리자 구수한 소여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응급실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 한 분과 4~50대쯤 되어 보이시는 푸근한 인상의 간호사 두 분이 계셨다.


우선 간단하게 체온을 재고,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셨다. 내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던 나에게 주사 세 방을 처방하셨다. 벌에 알레르기 반응이 심한 사람은 위험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알레르기도 없고 모두 괜찮다고 해주셨다.


‘저는 지금 디게 아픈데요... 아파요.’


그래도 마음이 놓였는지 거울에 보이는 내 입술이 제법 웃겨 웃음이 났다. 떡볶이를 먹다가 떡 하나를 윗입술에 올려놓은 듯 탱탱하고 두툼한 입술을 보고 간호사분께 한마디 했다.


‘그래도 입술 필러는 안 맞아도 되겠네요.’


그 순간, 배구선수가 스파이크를 날리는 수준으로 등짝을 한 대 때리셨다. 응급실에는 청아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고, 벌에 또 쏘인 듯했다.


벌에 쏘인 입술과 팔에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전통 치유법이 아닐까? 결국은 아프던 곳이 아프지 않게 된 것이다.



이날 뒤로 아버지는 벌초에 나를 데려가지 않으셨고, 나는 벌을 보면 몸을 수그리는 무의식적 습관이 생겼다. 벌써 햇수로만 6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며, 물론 등의 고통이 가장 선명하다. 삶은 따끔하고,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다.


잊을만하면 여름철 벌초 사고와 관련한 뉴스가 눈에 띈다. ‘설마 내가?’라는 안일한 생각보단, 한 번 더 조심해서 여러분도 등짝을 맞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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