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부터 강력한 너에게.
올해만 몇 번을 가는 건지 모르는 전혀 설레지 않는 파리행 기차에서 나를 설레게 하는 건 오로지 방금 도착한 아이들 사진이었다. 큰아들에게 문자를 했다. “are you excited?”
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득달같이 답이 왔다.
“Yessssss!!! First time outside of North America”
"너 어렸을 때 한국 한번 갔었어!"라고 말하려다가 기억이 안 나겠거니 싶었다. 가족 해외여행은 바하마, 아루바, 캔쿤 데리고 갔었는데, 북아메리카를 벗어난 것은 아니기에 아들 말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미국 내에 죽기 전에 여행해봐야 할 곳은 정말 많다. 하와이, 그랜드캐년, 나아가라 폭포, 뉴욕….. 실제로 유럽다음으로 전 세계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나라가 미국이고, 유럽을 각 나라로 쪼개어 보면 단일 국가로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한국에서 해외여행이라 하면 비행기 타고 2시간도 안 걸리는 일본을 가도 해외여행을 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미국인들은 뉴욕에서 비행기를 타고 엘에이를 가려면 6시간, 하와이를 가려면 11시간은 날아가야 한다. 뉴욕주의 크기만 보아도 대략적으로 남한 땅보다 크다.
이렇게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고립된 것 같은 미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어찌 보면 불편한 거리감 같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이 나라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다.
유럽처럼 국경을 맞댄 이웃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처럼 바로 옆 나라의 정치 불안이나 군사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구조도 아니다. 미국은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섬 같은 나라다. 지금까지 세계대전은 매번 유럽에서 일어났고, 아마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곳은 동북아시아가 아닐까.
두 대양,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뚝 떨어진 이 거리는 적들이 마음대로 건너올 수 없는 자연산 방어막이고, 아메리카대륙 안에서 모든 걸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완결형 경제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위로는 캐나다, 아래로는 멕시코. 둘 다 전쟁 걱정 없는 이웃이다. 만약 한국이 미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다면, 국방비는 지금의 절반으로도 충분했을 것이고, 청년들은 군대 대신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공부나 삶에 쏟을 수 있었겠지.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 위치에 있었다면 지금 같은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이 나라는 원래 그렇게 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까?
그랜드캐년을 바라보다 보면,
하늘과 땅, 그리고 시간조차 이 나라의 편을 든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 4위의 천연자원 보유국이며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은 땅도 넓고, 위협도 없고, 기후도 다양하고, 산업도 농업도 모두 가능한, 그야말로 신이 직접 설계한 전략적 요새.
그러니 전쟁은 늘 바다 건너에서 벌어졌고, 경제 위기가 닥쳐도 자국 내 소비만으로도 견뎌냈고, 전 세계 어딘 가에서 불이 나면, 미국은 기름을 들고 가는 대신 소방관처럼 개입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누렸다. 미국은 스스로의 크기와 위치만으로도 태생부터 유리한 게임을 하고 있다.
이 나라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 위에 자본과 기술, 문화가 덧대지며 지금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유럽의 도시마다 가득한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실감한다.
미국은 유럽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늘 미국에 기대어 러시아를 견제해야만 하는 유럽이 그토록 꿈꾸는 안정과 힘,
그걸 현실로 만들어 낸 나라라는 것을.
하지만, 美国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이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되묻게 된다.
지구의 탄생과 함께 부여받은 지정학적 축복, 그 위에 세워진 이민자들의 나라.
그러한 미국은 여전히 인류애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만을 위해 정진하고 있는가.
곧 미국의 관세 유예 시한이 종료된다.
이름값 하는 아름다운 결정이 내려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