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미국 교수가 멀찍이 보는 미국과 중국이야기

환전 없는 세계, 정말 편리한 걸까

by Dr Sam

올여름, 열 개 나라 이상을 넘나들며 출장과 여행을 다녔다. 새로운 도시마다 공항을 벗어나 지하철역에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걱정은 늘 같았다. "이 나라 교통카드는 또 어떻게 쓰는 거지?"

지난달 프랑스 파리에서 구입했던 임시 교통카드는 아직도 지갑 한편에 묵직하게 남아 있다. 10유로 가까운 보증금을 냈지만, 환불도 못 받고 그냥 들고 나왔다. 독일도 비슷했다. 낯선 시스템, 짧은 체류, 익숙하지 않은 키오스크 앞에서 몇 분씩 헤매야 했다.

그에 비해 런던은 참 편했다. 오이스터 카드 (Oyster card)도 있었지만, 비자카드 하나면 지하철이든 버스든 ‘툭’ 하고 태그만 하면 끝. 내가 가진 미국 신용카드(비자, 아멕스)로 그냥 결제가 됐다. 환전도 필요 없었다.

놀라웠던 건 지난달 방문했던 중국 상하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원래 중국은 모바일 결제 천국이라 Alipay나 WeChat Pay를 써야 할 줄 알았다. 나 역시 늘 알리페리를 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비자, 마스터, 혹은 아멕스 같은 국제 카드들이 상하이 지하철에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단순한 편의성으로 여겼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건 단지 교통비 결제가 쉬워진 정도가 아니야. 금융 권력이 점점 몇몇 글로벌 플레이어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뜻 아닐까?"

그러자 소름이 돋았다.
‘금융 지배력이 약한 나라에선, 언젠가 자국 화폐가 사라지는 미래가 올 수도 있겠구나.’


최근 미국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스테이블 코인(Stablecoin)”이 화제다. 이름부터 익숙한 듯 낯설다. 뭐가 안정적이라는 말일까? 올 5월 17일, 미국 의회는 다소 유쾌한(?) 이름의 “Geniuses Act”를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모든 스테이블 코인은 1 코인 = 1달러로 고정되어야 한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가격이 들쭉날쭉한 암호화폐와 달리, 스테이블 코인은 달러에 연동(pegged)되어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달러인 셈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건 단지 기술의 진보를 넘어서는 얘기다. 과거 미국은 “페트로달러” 체제를 통해 석유와 무역을 달러로 결제하게 함으로써 달러 패권을 유지해 왔다. 이젠 그 전략이 디지털 통화로 진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스테이블 코인을 전 세계 사람들이 송금, 결제, 저장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그건 곧 달러 지배권의 디지털버전이 될 수도 있다.


10여 년 전, 뉴욕에 살던 시절 어머니 생신을 맞아 500달러를 한국으로 송금한 적이 있다. 미국 은행에서 30달러, 한국은행에서 20달러, 총 50달러의 수수료가 들었고, 돈이 도착하는 데는 무려 3일이 걸렸다.

그런데 최근 스테이블 코인으로 테스트해 봤더니, 수수료는 몇 달러 수준에 불과했고, 3~5시간 안에 도착했다. 제3 국 은행을 거치지도 않고 말이다. 특히 금융 인프라가 열악하거나 환율 불안정이 심한 나라들, 혹은 자본통제가 심한 나라들에겐 이것이 진정한 ‘혁신’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송금 수요가 얼마나 될까?
실상은 놀랍다. 많은 중남미 노동자들이 미국 등지에서 가족을 위해 돈을 보내고 있고, 그 송금액은 몇몇 나라에서는 국내총생산(GDP)의 20~25%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다.
예컨대 2023년 기준:

니카라과: 26.2%

온두라스: 25.6%

엘살바도르: 23.9%

과테말라: 19.5%

도미니카공화국: 8.7%

스테이블 코인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 이런 송금 수요는 전통 금융을 건너뛰고 미국 달러 기반의 디지털 화폐로직 행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 지갑에는 미국 달러, 유로, 위안화, 원화, 그리고 이름 모를 각국의 동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대부분은 이제 돌아갈 일도 없을 나라들의 것이라, 잊힌 채 사라질 운명이다.

그러나 언젠가 지금처럼 다시 지구 한 바퀴를 돌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환전할 필요 없이, 스마트폰과 미국 신용카드, 그리고 디지털 스테이블 코인 지갑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편리한 세상일까? 편리함 뒤에는, 조용히 스며드는 힘이 있다.


국가의 화폐란 단지 거래 수단이 아니라, 주권과도 연결된 문제다.

글로벌 통화 시스템이 디지털화되면서, 지배력이 약한 나라의 화폐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우리의 원화는 과연 얼마나 안전할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국인 미국 교수가 멀찍이 보는 미국과 중국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