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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Jul 28. 2023

잡문본색 4

"A형 인간" 다시 생각하기 

“우리는 모두 A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파벳 A는 한자 사람인(人)의 그것과 닮았지요. 저는 그 ‘사람 인’에 획 하나를 더 긋고 그것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소통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가졌고 아무리 성품이 훌륭해도 사람인데 소통을 못하면 결국 소용없게 되니까요.”     


안철수 씨의 말이다. 정치인이 되기 전 그는 시골의사 박경철 씨와 전국을 돌며 청춘 콘서트를 열었고 큰 호응을 얻었다. 직접 참여했던 적은 없지만 당시 온라인에서도 큰 화제였기에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그의 말을 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중 인상적이어서 발췌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처음 저 말을 접했을 때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어떤 관계든 일단 맺게 되면, 그리고 어떤 소통이든 일단 시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임을 먼저 상기하고 싶다. “시간이 약”이라며 관계나 소통에서 비롯된 어떤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고, 더 나아가서는 좋은 추억마저 될 수 있다며 좋게 포장하려 애쓰지만 보다 냉정해지자. 관계나 소통에서 비롯된 고통의 총량을 큼지막한 짱돌처럼 stone이라 치환하고 그 고통이 비롯된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마치 냉전 기간처럼 cold라 치환한다면 본디 좋았던 기억만 간직하려 애쓰는 우리네 인간은 cold를 부러 말 그대로 cold 하게 그렇게 차갑게 냉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돌덩이 따위 stone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착각할 뿐이다. 하지만 정녕 그렇던가? 지금 내 삶을 핍박하는 근원을 따지고 보면 궁극엔 stonecold로 수렴하지 않던가?     


비극은 나 자신과 가까운 관계일수록 stonecold가 크게 자리 잡는 데 있다. 우선 연애나 결혼이 그렇다. 물론 기꺼이 stonecold를 감내할 수 있다면 비극은 아닐 테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서로 결별하거나 이혼함으로써 그렇게 남이 된다. 이 또한 사실 꼭 비극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테다. 남이 됨으로써 관계를 끝내는 게 역설적이지만 더 좋은 관계로 남는 경우가 분명 있으니까. 그렇게 관계를 끊을 수 있다면야 차라리 다행이지만 문제는 남이 될 수 없는, 관계를 끊기가 참 어려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그 자체로 따뜻하고 훈훈한 가족이라는 이름에 어찌 그런 먹칠을 하느냐 할 수 있지만 잡문본색 첫 글에서 분명히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읽고 나서 불편해지는 글을 선호하며 그 불편함이 불편함으로만 끝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는 외려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일 것이라고. 지금 우리 사회가 행복한 가족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그런 사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지금 행복하기로 소문난 가족도 한 번쯤은 서로가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생채기를 주고받았던 경험쯤은 있기 마련이다. stonecold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가족에게든 천형처럼 따라붙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참 좋아한다.     


“그저 무사태평해 보이는 저기 저 사람도 가슴속 어딘가를 두들겨 보면 분명 슬픈 소리가 난다.”


따라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A형 인간에서 다시 人으로 돌아오기. 중간에 이어진 그 획을 과감히 버리자는 것이다. 안철수 씨가 주장했던 소통을 버리자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그 획을 소통이 아니라 소통을 가장한 ‘집착’이나 ‘간섭’으로 본다. 그래서 그걸 버리자는 거다. 가족이라는 이름과 이유로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그간 참 쉽게 간섭하고 집착했다.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잖아” 나는 이 말의 진의를 믿는다. 하지만 그런 말 없이 묵묵히 옆에서 바라만 봐주는 것도 충분히 ‘잘 되라고 하는 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걸 더 믿는다.      


“잘될 거라는 막연한 낙관도, 그깟 취직 좀 늦어지면 어떠냐는 무책임한 위로도, 왜 이 정도 스펙 밖에 갖지 못했냐는 흔한 질타도 하지 않았다. 준비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냥 돕고,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술을 사 주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82년생 김지영>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우연치 않게 서점에서 보다 내용이 참 좋은 데다 특히 저 구절이 마음에 들어서 김지영과 동갑인 우리 누나한테 선물로 주었었다. 인용한 구절은 주인공 김지영이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을 때 당시 남자친구가 해주었던 것에 대한 묘사다. 소설인데 꽤 현실감이 느껴지는 반면, 현실에서는 정작 보기 드문 풍경이다. 그리고 ‘남’에 불과한 남자친구도 저런 바람직한 행동을 해주는 반면, 정작 ‘가족’들은 “막연한 낙관, 무책임한 위로, 흔한 질타”를 훨씬 많이 한다.      


가족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하고 서운한 점을 ‘지적’해줄 수는 있다. 그것까지 집착이나 간섭으로 본다면 너무 박할 테다. 다만 지적에서 그쳐야 한다. 엄마니까, 아빠니까, 형이니까, 누나니까, 동생이니까, 오빠니까... 고쳐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나가면 흔히 말하는 ‘선을 넘는 것’이고 간섭이나 집착이다. 역설적이지만 ‘부족함’이나 ‘결핍’도 나라는 인격체를 채워주는 ‘필수 구성요소’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면 이를 인정하고 그 부족함과 결핍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관계와 소통에서 비롯된 고통이 어쩌면 나 자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라고 우기고 싶을지 모르나 문제가 되는 그 간섭과 집착을 실은 내가 바라고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가 어쩜 그럴 수 있어?’ ‘아빠 맞아?’ ‘네가 그러고도 형이냐?’ ‘다른 누나들은 잘만 동생 챙겨주더구먼’ ‘너는 동생이라는 애가...’ 등등 등등. 스스로가 간섭과 집착을 바랐으면서 막상 해주니까 저런 가족 때문에 못 살겠다 불평하기 시작하는 순간 stonecold는 그렇게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서 응어리질 것이다. 엄마한테 아빠한테 형한테 누나한테 동생한테 각자의 역할을 바랐을 뿐인데 그게 뭐 잘못이냐 할 수도 있으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바로 그 역할이다. ‘기대되는 행동양식’이 역할의 사전적 정의인데 그 ‘기대’라는 것이 얼마나 충족하기 어려운지는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결국 진짜 문제는 나 자신이니까 ‘노오력’ 해서 가족을 바꾸고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도 바꾸자는 그런 ‘소오름’ 돋는 자기 계발서 같은 소리는 결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 자신부터 간섭과 집착을 버리자는 것. 그렇다 해도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영화 <특별시민>에서는 심은경이 최민식에게 “소통을 피하면 고통이 따르는 법”이라 일침을 가하지만 소통을 열심히 해도 고통은 따르는 법이다. 다만 줄일 수는 있다. 나 자신과 ‘쪼오끔’ 떨어져서 나를 보고, 또 그 떨어진 만큼의 거리에서 가족들을 보자.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따르기 마련이고, 나쁜 일 다음에는 또 좋은 일이 오기 마련이라지만 가족 관계에서는 한 가지 더 따르는 법이다. 가족 관계는 좋은 일에 따르는 나쁜 일을 겪으면서 더욱 나빠지고, 나쁜 일 다음에 오는 좋은 일을 겪으면서 더 좋아진다는 걸. 그리고 가족관계에 대한 진정한 낙관은 비관적인 관계를 비관적으로 보는 데서 출발하고, 비관적인 현실을 낙관하는 것만큼 심각한 비관은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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