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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Jul 27. 2023

번역본색 4

흑인들 말투 번역의 문제 

지난 번역본색에서 원작의 문체까지도 그대로 살리려는 노력을 번역에서는 마땅히 해야 한다고 썼는데 일일이 톺아볼 필요까지도 없이 상당 수의 번역서가 얼른 훑어만 봐도 이 부분을 별로 신경 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경우엔 각 등장인물들의 말투마저 거의 비슷한 걸 볼 수 있는데,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건 좀 아니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원작 자체가 특별한 개성이 없는 밋밋한 문체일 수 있고, 여러 군상의 등장인물들이라 해도 역시 원작 자체가 그들의 말투를 비롯해 각각의 차이를 부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그렇지 않았을 경우가 압도적일 것이다.     


부연할 필요 없이 번역자 입장에서 그건 그만큼의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마감에 쫓기는 역자들이 다수고 언제나 오역의 가능성을 숙명처럼 껴안고 사는 불안전한 입지에서 굳이 문체와 말투까지 엄정하게 번역할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역자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문체와 말투 번역에까지 공력을 들인 티가 역력한 역서를 발견하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음 또한 어쩔 수 없다.      


전공이 영문학이다 보니 문학 작품에서 이를테면 그 특징이 매우 두드러지는 흑인들의 말투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개인적인 궁금증이 생겼을 때다. 그즈음 바로 떠오른 작품이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 Bird)>였고 김욱동 교수의 번역서를 먼저 살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워낙 입지적인 번역가이시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그 수많은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번역서들 중에서 그의 역본이 가장 원서에 가까운 역서라고 생각해서였다. 해서 기대감을 안고 펼쳐봤는데 솔직히 아쉬웠다. 그는 흑인들의 말투를 특정 지방의 사투리로 번역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임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원서에서 나타나는 흑인들의 말투는 문법을 무시한 채 단어들만 나열하는 식이며 그나마도 스펠링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걸 우리나라 특정 지방의 사투리로 번역을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지금은 그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났어서 지적한 부분이 수정되었을 수 있는데 게으른 내가 미처 확인도 하지 않고 단지 예전에 그랬다는 이유로 일종의 '저격'을 한 것처럼 읽힌다면, 그래서 혹여라도 문제가 불거진다면 언급한 것처럼 오롯이 태만한 내 책임이며 전적으로 내 문제임을 밝혀둔다.

      

흑인들의 말투가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작품을 생각해 보니 그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故안정효 선생의 번역본이 있어 쾌재를 부르며 살폈다.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금 들뜬 마음에 이번에는 아예 해당 원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Ah ain’ no free issue nigger,” declared the driver with heat. “Ah b’longs ter Ole Miss Talbot an disyere her cah’ige an’ Ah drives it ter mek money fer us.”      


주변의 다른 문맥 없이 부분만 달랑 떼어 온 것임을 감안해도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할 것이다. 흑인들의 말투가 어떠한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 아무래도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해 일부러 그랬다. 다른 역자들은 어떻게 번역했나 싶어 몇몇 역서들을 살펴보니 이런 원문을 ‘무시하고’ 올바른(?) 문체로 번역을 한 경우도 있었고 (그렇다. 나는 그걸 ‘무시’라고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 특정지방의 사투리로 번역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안정효 선생은 어떻게 번역했을까?     

“나 해방 깜둥이 아뇨,” 화를 벌컥 내며 마부가 한마디 했다. “나 탈보트 노마님 종이고 여기 이건 노마님 마차고 나 우리 식구 위해 돈 번다고 이 마차 몹니다.”      


상당히 참신하다는 첫인상이었고 선생이라면 필시 이렇게 번역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겨 알아보니 그는 중국 화교들의 한국어 화법에 주목했다고 한다. 문법적인 부분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분명히 어색한 어투지만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는 그들의 한국어 말투를 보며 해당 부분을 번역하는데 실마리를 구했다고 한다*


* 당연하지만, 화교들이라 해서 그들이 모두 똑같은 한국어 화법을 구사하지도 않거니와 안정효 선생이 번역한 어투와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전혀 어색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역시 혹 문제가 생긴다면 어디까지나 부족한 내 소양과 필력 탓이다.

     

선생의 번역이라 해서 꼭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번역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표준 한국어로 번역을 해버리거나 특정 지방의 사투리로 번역을 해버린 것들에 비해서는 훨씬 정답에 가까운 번역이라 믿는다.      

“I am not a free Negro,” declared the driver with heat. “I belong to Old Miss Talbot and this here is her carriage, and I drive it to make money for us.”     


인용한 부분을 표준 영어로 옮기면 위와 같다. 원서들 중에서도 이런 표준 영어로만 다시 쓰인 것들도 있다. 그렇지만 흑인들 말투가 두드러지는 문학 작품들 원서를 많이 접해본 이들은 분명히 인지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들만의 특유한 어법과 어투가 그 작품의 매력이기도 한 부분을 표준 영어로 옮겨 버리는 행태는 결코 독자들을 위한 길이 아니라 믿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문장의 호흡이 매우 길고 까다로운 구문의 원서를 가독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짧고 쉽게 다듬어 번역하는 행태 역시 결코 독자들을 위한 길이 아니다. 말이 좋아 ‘다듬는’ 것이지 ‘난도질’에 다름 아니다. 번역의 ‘시작’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한 번에 소화시키기 버거우니까 좀 쪼개서 그렇게 충분히 나눠볼 수 있다. 그러나 ‘완성’된 번역본을 그래서는 곤란하다. 똑같은 김밥 한 줄도 통째로 들고 씹어먹을 때랑 한입 크기로 나눠 썰어 먹을 때랑 분명히 다른 맛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한 줄 통째로 쓰인 원서를 멋대로 썰어버린 번역은 그 자체로 무지막지한 오역 덩어리라 믿는다.      


아무리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도 평소 강하게 생각하는 바를 쓰다 보니 곳곳에 흥분이 묻어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네 번째 글이라 해도 처음으로 주석 비슷한 표시까지 해가며 변명도 했다. 그것이 얼룩처럼 보인대도 어쩔 수 없다. 얼룩이라 해서 흠이 아니라 얼룩말처럼 그 자체로 인정해 주시면 감사드릴 따름이고, 감히 누구더러 오역 덩어리라니, 너야말로 똥고집 똥덩어리라 간주해도 반박할 생각은 없다. 다만 타협할 생각도 1도 없다.      


끝으로 특정 작품들을 예로 들기는 했지만, ‘흑인들 말투’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 중대한 인종차별적 문제가 이 글에 있을 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 내가 아무리 그런 의도가 결코 아니었다고 떠들더라도, 읽는 사람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함이나 분노의 감정이 들었다면 무조건 그들이 옳다고 믿어서다. 아울러 예로 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또한 보다시피 작품 자체에 심각한 인종차별적 요소가 많아서 오늘날에는 단순히 논란을 넘어 작품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분위기인데 이 역시 바람직한 바람이 부는 풍경이라 믿으며 훗날 제목 그대로 그런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대도 딱히 아쉬움이 들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다른 부분은 다 사라져도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그 유명한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는 끝내 사라지지 않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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