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밌는 '파이 이야기'
8월을 맞아 새로 연재를 시작하자 싶어 우선 ‘본색’ 시리즈로는 그대로 두고 어제 잡문본색에서 조지 오웰을 다룬 만큼 새 연재는 독서로 정했다. 그랬더니 책은 저절로 정해졌다. 원서 제목은 <Life of Pi>, 바로 <파이 이야기>다. 저절로 정해졌다고까지 말한 이유는 우선 이 책은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책 중 하나고 미국 유학시절 처음으로 갔던 미국 최대의 대형서점 Barnes&Noble에서 구입했던 첫 책이기도 하며 숫자 8을 옆으로 눕히면 수학에서 무한대 기호가 되는데 바로 무리수 파이가 그렇기도 해서 8월에 시작하는 독서본색 그 첫 책으로 마치 이미 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어서다.
나는 종이책의 물성을 상당히 중시하는 사람이라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우선 내용을 훑기 전에 왼손으로 책등을 받치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책을 촤르르 넘겨본다. 영어로는 이걸 thumb through라고 하는데 순전히 개인적 취향이지만 나만 느끼는 이 질감을 통과해야 비로소 내용 훑기에 들어가고 이걸 영어로는 leaf through라고 한다. 영문본색이 아닌 고로 영어는 이쯤 하고 여하튼 이 책은 그 두 단계를 가뿐히 통과하고 자연스럽게 짝다리를 짚고 한쪽 어깨를 책장에 기댄 채 한 장 한 장 차분히 읽다가 아예 자리 잡고 앉아 양반다리도 했다가 양다리를 쭉 폈다가 그렇게 3분의 1 이상 정도 즈음 읽었을 때 책을 덮는다. 이건 무조건 사야 하는 책이니까.
그렇게 구입해서 마저 읽는 내내 줄곧 들었던 생각. ‘이거 영화로 만들어지면 진짜 끝내주겠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회의적이었다. 다른 애로사항들도 많겠지만 우선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호랑이를 무슨 수로 연기시킬 것인가. CG로 대신한다 해도 원작 소설이 주는 이 엄청난 디테일은 CG가 아무리 용을 쓴들 결국 GG 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영화화가 결정되었고 무려 이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소식에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그래, 이안이라면 200킬로가 넘는 벵골 호랑이도 그만큼 대배우로 만들 수 있을 거야!’
해서 영화도 개봉하자마자 바로 관람했다. 이안 감독이라면 원작을 많이 재해석해서 그만큼 새롭게 재구성할 거라 예상했는데 실제 영화는 놀라울 만큼 원작에 충실했다. 그게 아쉬웠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이안 감독의 인터뷰를 봤더니 그는 이 책이 출간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읽었으며 읽자마자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고 처음 생각했던 바와는 달라진 부분들도 물론 있었지만 제작 전부터 한 가지는 반드시 고집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바로 주인공 파이는 무조건 신인 배우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작품 속 16살 소년이 지니는 불안, 초조, 절망,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용기는 신인 배우만이 그 느낌을 잘 살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잘 들어맞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아쉬웠던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책에서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한다. 이를테면 주인공 파이가 생각하는 신은 절대적이고 무한대의 힘을 지녀야 하는데 그런 그가 보는 예수님은 신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인간적이다. 배고픔도 느끼고 좌절도 해서 언젠가는 무화과나무에 갔더니 열매를 맺을 계절이 아닌지라 앙상한 나뭇가지뿐이었는데 배고팠던 그는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지어다!”라고 그 좌절감을 숨기지 않았고 실제로 나무는 시들어 죽었다는 부분을 꼬집으며 무슨 신이 이리도 까탈스럽고 억지스럽냐 볼멘소리를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보기에 “힌두교는 유유히 흐르는 갠지스 강이라면 기독교는 토론토의 러시아워” 같다. 이처럼 저자는 실감 나는 묘사로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얼룩말을 가리켜서는 “말들 가운데 롤스로이스”라 하고 바다거북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매사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성질 고얀 노인네처럼 거만하고 매정한 표정”이라 한다. 무엇보다 천상 ‘이야기꾼’이구나 하는 생각이 책장을 덮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인도 소년이라는 한정된 인물, 바다 위 작은 보트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호랑이와의 동고동락이라는 한정된 소재로 이렇게 무한대에 가까운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역량의 작가는 적어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책에서는 없지만 영화에서 보인 장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작품 속 호랑이의 이름은 리처드 파커, ‘목마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영화에서 주인공 파이는 성당에 들어가 신부님한테 목이 많이 마르니 물 좀 주라는 말을 먼저 하는 장면이다. 작품의 결말을 놓고 볼 때 이 장면이 상당한 ‘복선’ 역할을 한다고 느꼈다.
반면에 영화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책에서는 언급되는 부분 중 인상 깊었던 건 작품 초반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개별적인 동물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 위험성에 대해 조목조목 읊어주는 부분이었다. 사실 특별할 것도, 작품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부분인 것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꽤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오랑우탄은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사람의 뼈를 아스러뜨릴 수 있고 타조는 킥 한방으로 사람의 등뼈를 아작 낼 수 있으며 점박이 사슴의 뿔은 전투용 단검보다 날카로운데, 가장 위험한 동물은 코끼리다. 그 이유는... (흥미가 당기는 분은 직접 읽어보시길).
아버지로부터 동물들에 대한 이런 산교육을 받은 파이는 덕분에 동물들의 행태와 습성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한다. 모든 동물은 자기 영역에 민감한데 이걸 오히려 잘 이용하면 그 어떤 사나운 맹수도 통제를 할 수 있다는 걸 안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구체적인 방법들이 책에서는 상당히 세세하게 언급되는데 영화에서는 아무래도 시간상의 제약 때문이겠지만 그런 언급이 없어 아마 책을 안 보고 영화만 본 분들이라면 ‘아무리 그렇다고 저 큰 호랑이가 저 작은 보트 안에서 더 작은 소년 하나 못해보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꼭 책을 함께 읽어보길 권장하고 싶다.
하지만 또 영화는 이렇게 본질적으로 제약과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오히려 바로 이 이유로 책에서 전하는 사람과 동물의 공통적인 속성, 그 생명의 유한성을 담아내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랜 굶주림으로 말라비틀어져 초췌해진 리처드 파커에게 다가가 파이가 무릎베개까지 해주며 미안하다고 흐느끼는 장면은 영화가 보여주는 장점을 극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무한성을 담아내면서 동시에 이 책은 총 10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듯 100은 일반적으로 완벽한 숫자로 간주된다.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원주율 파이처럼 무리수와 같아 끝없이 펼칠 수 있는 반면에 생명이라는 것은 노래 가사에서와 같이 말 그대로 ‘끝이 정해진 책처럼’ 유한적이다. 이 책의 저자 얀 마텔은 아마도 이 둘을 연관시키고자 혹은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자 100장이라는 한정된 안정적 숫자에 3.141592....라는 무한한 불완전 이야기를 담은 것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안고 본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의 말은 자못 처연하게까지 느껴졌다.
“혹시라도 독자들이 예술가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우리 예술가들은 잔인한 현실이라는 제단 위에 상상력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을 것이고 가치 없는 허망한 꿈만 비참한 결말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