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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Aug 10. 2023

번역본색 7

"번역의 공격과 수비"에 대하여 

“운동경기에서는 공격과 수비가 잘 맞물려야 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약하면 다른 한쪽이 강하다 하더라도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번역도 마찬가지다.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 번역을 가르칠 때 원문에 나오는 쉼표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철저하게 번역하라고 요구한다. 그런가 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매달려 딱딱하게 번역하지 말고 한 발자국 물러나서 유연한 태도로 융통성 있게 번역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이 상반된 두 가지의 태도가 번역에서는 공격과 수비에 해당한다. 쉼표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충실함은 수비적인 개념이다. 반면에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다분히 공격적인 개념이다. 언제 공격하고 수비하느냐가 운동경기에서 승패를 좌우하듯 번역에서도 완성도를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 번역은 나무 키우는 일과도 비슷하다. 나무 한 그루를 잘 키우려면 잎사귀 하나도 소중히 다루고 가꾸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과감하게 가지들을 쳐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번역에서 공격과 수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모순의 논리인 것이다.”     


번역본색에 항상 언급하는 故안정효 선생이 <번역의 공격과 수비> 저서에서 남긴 말씀이다. 번역가를 지망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쪽으로 관심이 있다면 원서와 번역서를 함께 놓고 비교 및 대조해 보는 걸 권장한다. 원서가 영어라면 영어 학습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번역서를 보면서는 우리말 실력도 향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가 된다면 번역서를 한 권만 택할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번역서들을 놓고 본다면 그만큼 더 실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고 독서의 즐거움도 함께 얻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번역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도 느낄 수 있어서다.      


개인적으로 맨 처음 그렇게 원서와 번역서를 함께 놓고 봤던 작품은 <어린 왕자>였다. 물론 원서라고 하면 엄밀히는 프랑스어여야 할 테지만 띄엄띄엄이라도 읽어낼 줄 아는 외국어가 영어뿐이기에 어쩔 수 없이 영문본을 택했었다. 국내 번역본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서점만 가도 볼 수 있듯 꽤 많이 있어 이름난 역자들을 택해 봤었는데 세부적인 번역들이 저마다 차이가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워낙에 좋아하는 작품이라 일부러 택한 것이기도 했는데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당시 나는 생텍쥐페리의 영문 표기를 St. Exupery라고 하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이 작품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접했다면 나는 아마 ‘성 엑수페리’인가 하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역들이 여전히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본의 아니게 ‘저격’이 될 수 있기에 좀 더 신중하자 싶어 보류하고, 관련하여 언급하자면 고유명사는 번역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인지 그냥 외래어 표기로 써버리곤 하는 경우는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다. 논쟁의 여지야 물론 있겠지만 그걸 ‘번역’이라고 하기엔 어렵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다. 안정효 선생의 견해를 빌자면 그건 공격도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서 어떻게 보면 매우 무책임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로 보자면 외래어 표기를 따르는 지명이라도 어디까지 수비하고 공격해야 할 것인지 모호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New York과 Los Angeles는 영어로 표기할 때는 이렇게 반드시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데 한국어로 표기할 때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처럼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수비적인 입장이라면 우리말 표기도 응당 띄어 써야 하겠지만 그렇게 쓰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본 일이 없다. 그렇다고 단지 붙여 쓰는 걸 ‘과감한 공격’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하긴 우리말 표기 자체가 한 단어로 쓰는 전문용어일 때는 ‘띄어쓰기’와 같이 붙여 써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띄어쓰기를 띄어 써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애매하고 모호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번역에서도 적용되는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볼멘소리를 더 하자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번역본색 첫 글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바른 번역’보다는 ‘빠른 번역’을 처음부터 선호했고 따라서 애매하고 어설프며 모호해도 전반적인 뜻만 통하면 된다는 관점이 팽배했을 것이다. 거기에 동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는다거나 세계 최초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기록을 중시하는 군사 문화적 요소가 번역에도 스며들어 번역마저 오로지 목적 달성을 위해서만 노력하는 작업이 되었다고 보면 너무 가혹한 관점일까. 박할지언정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태도에서 문장부호 하나까지 철저히 번역해야 한다는 수비적 관점은 태평하고 팔자 편한 소리로 간주했을 것이고, ‘문체’도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는 요원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초전도체’로 번역했다고 우기면 되려나.     


지금은 <The Scarlet Letter>가 <주홍 글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걸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주홍 글씨>라는 번역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글자’와 ‘글씨’는 엄연히 서로 다른 단어고 글씨는 필체가 있을지언정 거기에 색깔을 입힐 수는 없음을 조금만 생각해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관련하여 이 scarlet은 단순히 색을 나타낼 뿐 아니라 간통이나 불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기 때문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Scarlett O’Hara의 이름에서도 관련이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별생각 없이 짓는 작가들도 물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특히 주인공이라면 이름에서부터 그 성격이나 태도를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보다시피 Scarlett은 t가 하나 더 들어 있고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녀는 임자가 있는 다른 남자의 마음을 얻으려는데 여념이 없다. 따라서 그녀가 말하는 “Tomorrow is another day”는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라고 번역하는 건 지나친 ‘공격’이라는 게 안정효 선생의 견해였고, 선생은 “오늘만 날이겠어” 하고 번역했다.      


미국 유학을 마친 후에도 일정상 종종 미국에 가고 내일도 그렇게 출국을 앞두고 있다. 갈 때마다 항상 들르는 서점에서는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번역 출간이 되었는지 확인을 하는데 아닌 경우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좋은 책이 공들여 번역 출간 되었음에도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는 경우만큼이나 안타까웠고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 경험을 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양서가 발 빠르게 번역까지 되어 그렇게 번역서를 먼저 보고 미국에 가서 원서로 보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이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이렇게 상반된 감정을 지니는 것도 어떻게 보면 호사일진대, 번역에서 공격과 수비를 항상 챙기는 마음으로 늘 겸손한 마음을 되새길 것을 새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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