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이었다.
거리에는 온통 봄을 즐기러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따뜻한 햇살과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 꽃내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들뜬 기분으로 따뜻한 커피를 한잔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의 향이 꽃향기와 섞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들었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쯤 한 노숙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계절에 맞지 않는 겨울 패딩을 입고 있었고 때국물이 흐르는 바지는 맨질 거렸다.
머리는 하얗게 세어 버린 채 제멋대로 뻗친 장발이었다.
키도 크고 자세도 반듯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해 언뜻 보면 노숙자로 보이지 않았지만
계절에 맞지 않는 옷 차림새와 오랫동안 씻지 않아 얼굴에도 때가 잔뜩 묻어있어
대번에 노숙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한쪽 눈에 약국에서 파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하연 안대를 하고 있었다.
봄을 맞아 잘 차려입은 나들이객들과 대비되어 더욱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곳은 근처에 역이나 시설 같은 곳도 없고
직장인들이 많은 오피스 밀집 지역이라 노숙자가 있다는 사실이 더욱 신기했다.
이질적인 관심으로 시선이 1분 정도 그에게 머물렀을까?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던 그는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키고는 터벅터벅 나에게 가까워져 왔다.
"커피 한잔만 사주시겠습니까?"
어느샌가 나의 앞에 다가온 그는 나에게 커피 한잔을 사주기를 요청했다.
보통 노숙자는 돈이나 먹을 것을 요구할 텐데 대뜸 커피를 사달라는 요청과
너무 정중하고 어쩐지 기품까지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 당황스러우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죠. 뭘로 드시겠습니까?"
"같은 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와 같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해서 받아 들고는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커피를 받아 들고는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서는
여유 있게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돈을 구걸해 바로 술을 사 먹거나
도박에 탕진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커피 한잔을 요청한 그가 특별하게 생각되었고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작은 선의를 베풀었다는 느낌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며칠이 지나 나는 다시 그 카페를 찾았다.
오늘도 따뜻하고 기분 좋은 날씨였고 나는 역시 커피를 주문하고 야외에 앉았다.
커피를 두 모금쯤 마셨을 때 시선 끝에서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과 똑같은 차림새였다.
그는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내쪽으로 반듯이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와
며칠 전과 똑같은 말투로 나에게 커피를 요청했다.
"커피 한잔만 사주시겠습니까?"
나는 며칠 전과 다르게 당황스럽지 않았고 너무 나도 당당한 그에 태도에
조금은 어이가 없어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렇군요,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는 너무 나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뒤돌아섰다.
그때 나는 또다시 그에게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저기, 잠시만요."
그가 뒤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이야기하신 커피 한잔 사드리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 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그는 1초 정도 아무 말 없이 있다가는 이내 대답했다.
"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나는 커피 한잔을 주문해 받아 들고는 맞은편에 앉은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음... 실례가 되는 질문 같지만...."
내가 망설이며 뜸을 들이자 그는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시고는 말했다.
"왜 길에서 이렇게 지내는지 궁금하신 건가요?"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그럴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나는 왠지 민망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고는 입술을 다물고 힘을 주어 위로 올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흠... 제 말을 믿으실지는 모르겠네요."
잠깐의 침묵 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남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국내 대기업의 근무하는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회사에서의 입지도 나름 탄탄했다고 한다.
좋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대기업까지 입사한 그는
30대 중반까지 승승장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늘 누군가와 데이트를 이어 나갔고
좋은 사람을 가리고 가려 최고의 신붓감과 결혼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말투와 분위기에서 풍기는 정중함과 기품은 그런 그의 배경에서 기인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제가 어쩌다 커피 한잔도 못 사마시는 처지가 되었는지 궁금하시죠?"
그는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가 어느 날 출근을 하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른쪽 위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단순히 피로하거나 마그네슘이 부족한가 보다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마그네슘과 종합비타민, 피로회복제를 꾸준히 먹어도
오른쪽 눈꺼풀은 계속해서 떨려왔고 그 빈도와 정도는 갈수록 심해져갔고 한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겪은 일들을 그저
가감 없이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저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고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지만 먼저 물어보셔서 대답해 드리는 것뿐이니
알아서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이미 여러 사람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한 듯싶다.
그걸 들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를 사기꾼 혹은 광인 취급 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특별히 아프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고 회사일이 바쁘다 보니 그저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나라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당시를 회상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도 늘 그렇듯 출근해서 업무를 보던 중 친한 동료직원과 업무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는 순간 오른쪽 눈꺼풀이 강하게 떨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부터는 분명히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눈꺼풀이 떨리면서 그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아주 이상했죠."
"재수 없는 새끼. 잘난 척은 혼자 다하네."
남자는 뒤를 돌아 동료를 노려 보았지만 그 동료는 웃으며 커피를 마시며 되물었다고 한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렇게 무섭게 봐요?"
남자는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자기가 잘못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여태껏 한 번도 특별하게 부딪힌 적 없는 친한 동료였기에 더욱더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좀 피곤한가 봐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거울을 봤다.
오른쪽 눈꺼풀은 특별히 아프거나 붓거나 하지 않고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냥 가끔 부르르 떨릴 뿐이었다.
그는 얼굴에 물기를 핸드타월로 대충 닦아 내고는 화장실을 나왔다.
곧이어 복도에서 같은 팀이었던 여직원과 마주쳤고 그는 점심을 제안했다고 한다.
"윤대리. 잘 지내지? 그쪽 팀은 어때? 오늘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어머 죄송해서 어쩌죠~ 저 오늘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꼭 먹어요."
그녀가 대답을 이어 나갔을 때 또다시 오른쪽 눈꺼풀이 떨리며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미친 새끼, 그동안 지랑 먹은 게 좋아서 먹은 줄 아나 보네. 이제 팀도 다른데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고 그를 보면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분명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너무나 혼란스러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정수기에서 냉수 한잔을 들이켜고는 그는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생각하자고 되뇌었다.
무언가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이 그는 회사를 나섰다.
"안과를 가야 할까? 아님 정신과를 가야 하나?"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그동안 눈이 신경이 쓰여서 내가 순간 과민해졌을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안과를 찾았다고 한다.
진료를 기다리고 전문의를 만난 그는 몇 주 전부터 일어난 눈에
이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눈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와 과로를 조심하시고
마그네슘이 포함된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드릴 테니 며칠 드셔 보시고
3일 후에 내원하세요."
진료를 마치고는 약국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는 피로회복제를 하나 사서
약과 함께 털어 마셨다. 나도 모르게 피로가 쌓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회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하고는 그날 하루는 집에서 푹 쉬 기로 했다.
"그날 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대충 먹고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상한 꿈을 하나 꾸었지요."
꿈속에서 그는 움직일 수 없었고 다만 멀리서 어떤 길쭉하고 기분 나쁜
여자가 마치 무당벌레 같이 빨간 바탕에 검은 점이 찍힌 옷을 입고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한 발짝씩 걸어오는 꿈이었다.
여자는 삐쩍 마른 몸에 배만 불룩 튀어나고 얼굴은 창백했는데
손가락은 이상하리만치 길었고 마디가 볼록해 마른 나뭇가지와 같이 보였다.
창백한 나뭇가지와 같은 손가락 끝에는 톱니처럼 갈라진
길쭉한 손톱이 지저분하게 붙어있었다.
눈은 푹 꺼져 마치 눈동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검은 자가 조그맣게 보이는 사백안이었다. 갸름한 미인형의 얼굴이지만
어쩐지 몸서리가 쳐지는 기이한 얼굴을 하고는 입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오른쪽 눈꺼풀이 부르르 하고 떨렸다.
겨우 잠에서 깨어보니 온통 땀 투성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어나 물을 한잔 마시고는 오른쪽 눈에 손을 대어 보았다.
약이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조금은 편안했다.
이틀 동안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
약을 잘 먹어서 인지 떨림도 없었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삼일째 되는 날 약을 모두 먹고는 병원에 다시 내원을 할지 고민이 되었다.
눈의 떨림도 멈췄고 나름 푹 쉬어서 이제는 괜찮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을 했다.
오늘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회의가 있는 날이어서
10시 즈음 회의실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는 순간
옆에 앉은 상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재수 없는 새끼는 왜 여기 앉는 거야? 으휴"
또다시 떨리 눈꺼풀과 함께 또다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고
상사는 말없이 회의 자료만을 훑어볼 뿐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어도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눈꺼풀은 계속해서 떨려왔고 수많은 소리들이
소용돌이치듯 머릿속을 헤집었다.
"회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긴 거야?"
"오늘 점심은 뭐 먹지?"
"퇴근하고 김대리한테 술 한잔 하자고 하면서 꼬셔볼까?"
회의가 끝나자마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뛰쳐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특별한 치료 가벼운 찜질과 약을 처방받아 약국에서 약을 받은 후
단숨에 털어 넣었다.
눈꺼풀에 떨림은 잦아들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과 라도 가봐야 하는 건가?"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아까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는 조금 심각해졌다.
그리고 동료들이 자신을 가식적으로 대할뿐더러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닌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다행히 약을 먹는 동안은 눈에 떨림도 이상한 목소리들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약을 먹는 동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눈꺼풀에 떨림도 없었고
나를 보며 가식적인 연기를 하는 동료들도
그대로였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동료들이 마음속으로
뭐라고 욕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니
가증스럽고 또 역겹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니 사람들에 속마음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뒤에서 놀다가 실적만 부풀려서 내가 한 것처럼 보이게 해야겠다"
"오늘 끝나고 신대리 만나기로 했는데 마누라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박 부장 새끼 내가 사람 써서 죽여 버린다. 언젠간 진짜 죽인다."
사람들의 마음속 이야기들을 들으며
남자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러진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이후에는 어쩐지 재미있게 느껴졌다.
남자는 더욱 자주 아니 거의 계속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것보다 사람들의 날것 그대로의
속마음을 듣는 것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병원을 찾지 않았고
그날 밤부터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그 꿈은 언제나 똑같았다.
기분 나쁜 그 여자가 떨리는 눈을 가리키며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는 꿈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가
날로 날로 가까워 온다는 점뿐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쾌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점점 예민하고 괴팍하게만 변해갔다.
"그때 병원을 계속 갔더라면 이지경이 되지 않았겠죠."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하얀 플라스틱 안대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남자가 병원을 아예 찾아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광적으로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보는 것에
집착했다가도 눈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자신이 무서워
병원을 다시 찾은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만 했고
약을 먹으면 증상은 사라지고 악몽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이 속으로 자신을 어떻게
말할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약을 먹지 않고 병원을 가지 않으면
금세 다시 눈꺼풀이 떨리고 목소리가 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악몽을 꾸었다.
"남의 마음을 엿보는 것은 심연을 엿보는 것과 다름없더군요"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심연을 들여다보다 심연에 먹혀 버린 것같이
남은 한쪽 눈에 허망한 빛을 보이며 말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이 눈앞에 와있었습니다."
그는 그날이 생각나는 것처럼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듯
그저 두려움이라는 감정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더욱 기괴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두 눈이 있던 자리에는
구멍이 뚫려 있더군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검은 구멍 말입니다."
그는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황량한 눈동자를 한채
어깨를 감싸 쥐고는 더욱더 세차게 떨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요.
다음날 병원을 가려고 했는데...."
그는 말을 잊지 못한 채 한참을 있었다.
진정이 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잠시 한숨을 몰아쉬고는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만 하고 바로 병원으로
바로 가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치료를 받으면
꿈속에서 그것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모두 나에 대한
그 소리들 말입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저 새끼 요즘 좀 위험한 것 같은데 눈빛 좀 봐"
"재수 없는 새끼 꼬락서니가 왜 저러지?"
"어우 냄새나는 것 같아 제발 가까이 오지 말아라."
수많은 소리들이 웅웅 거리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고 오른쪽 눈꺼풀은 떨리다 못해
욱신거렸다.
그는 오른쪽 눈을 감싸 쥔 채로
비명을 지르며 마구 난동을 부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의식을 잃었을 때 그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눈동자 바로 앞에는 톱니처럼 갈라진
길고 지저분한 손톱 하나가 보였다.
"그것이...."
그는 안대로 가려진 눈을 감싸 쥐고는
격렬하게 떨었다.
"손가락은 아주 천천히 눈동자를 파고
들어왔습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한 고통에 나는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거기가 바로 꿈속이었으니까요.."
그는 마치 어제 겪었던 일인 듯
창백해져 다른 사람의 얼굴 같이
변하여 말을 이었다.
"눈을 감을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즐기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습니다."
그가 극한의 고통에 끝에 다다를때즘
가까스로 꿈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그때부터 오른쪽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떨림도 멈췄고요
병원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신경이 모두
죽어버렸다고 하더군요."
그가 말을 마치고 빈커피잔을 만지작 거릴 때
나는 도무지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커피를 얻어먹기 위해 삼류 공포 소설을
차용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역시 당신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봤을 때
그의 왼쪽 눈이 격렬히 부르르 떨렸고
나는 그의 굳은 표정과 격렬히 떨리는
눈꺼풀이 무서워져 아무 말 없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이후로 한동안 그를 마주칠까 봐
커피숍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3개월쯤 뒤 퇴근길에 우연히
커피숍을 지나게 되었고
나는 그때 멀찍이서 그 남자를
다시 보았다.
행색이나 차림은 변함없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이제는 안대가
아닌 양쪽 눈 모두를 천으로 두른 채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손에 든 채로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