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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Dec 02. 2023

계획형 인간의 무계획을 위한 계획

계획대로 안되면 좀 어때서


계획형 인간


오늘도 희망찬 5시 알람이 울린다. 조금만 뭉그적거려도 바빠진다. '1분만 더..'라고 응석 부릴 시간이 없다. 다소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운동을 한다. 땀이 식기 전에 씻고 세탁기를 돌린다. 아침 준비를 하고 늦지 않게 아이도 깨운다. 문득 오늘 날씨도 좋아 보이는데 바다나 보러 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참, 오늘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고 세탁기 끝나면 건조기도 돌려야지. 내일 신랑 시험 치러 가니까 간식도 준비해야 되잖아. 못 가겠네.'


전부 나중에, 적당히 오늘 안에 끝내면 되는 일인데 나 혼자만 모른다.



계획대로 되는데 뭔가 아쉽다


오전 10시 30분, 계획된 집안일을 모두 끝냈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브런치를 준비한다. 살짝 구운 통밀빵은 바삭 쫄깃하고, 사과는 너무 맛있어서 달다고만 하기에는 아깝다. 인스턴트 미트볼도 나쁘지 않네. 바닷가에서 사 먹었으면 적어도 15000원은 썼을 텐데. 물가도 많이 올랐는데 돈 아끼고 잘 됐지 뭐. 오물오물 한참을 먹었는데도 아직 11시 밖에 안 됐다. 이럴 거면 그냥 바다 보러 갈 걸 그랬나? 왠지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든다. 설거지를 끝내 놓고, 몇 번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동네 카페에 왔다. 이 시간 아니면 집중해서 할 수 없는 '끄적거리기'도 할 겸.


어제 내가 세운 (마음속) 일정표에 바다 보러 가기나 동네 카페 가기는 없었다. 간단하게 아점을 먹고 나서 아이 하교 전까지 집에서 조용히 '오늘의 글쓰기'를 하면 되는 거였다. 왠지 아쉬운 마음에 큰맘 먹고 일정을 약간 바꿔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도 괜찮았다. 바닷가에 갔다면? 돈은 더 썼겠지만 역시 별일 없었겠지.


사소한 집착


나에게는 동네 카페 가는 것도 약간의 결단이 필요하다. 시장 보러 갔다가 목이라도 축일 겸 카페에 들렀다 오는, 아주 사소하고도 무계획적인 일상을 즐기지 못한다. 귀찮아서 그런 거냐 하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계획된 일이라면 30분을 걸어가서 책 한 권 반납하고 다시 30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 반대라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돌발 상황이 일어날까 봐 무서운 거다. 계획은 안정, 무계획은 불안정이라는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면 계획적인 삶을 살면서 그 스케줄에 만족해야 하는데 늘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일정이었다면 더 좋았을걸. 아니면 미리미리 생각해 둘 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계획표는 세웠지만 다른 한편에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걸까. 할까 말까 하다 이내 그만둔다. 내 생각과 조금만 달라져도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인데도.


물론 계획성 있게 생활하면 좋은 점이 많다.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종종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다. 여유 있게 지내고 싶어서 계획을 세운 것인데, 그로 인해 오히려 급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런 나의 조급함은 우리 집 두 남자에게로 화살이 돌아간다. 내 기준을 나에게만 적용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계획 없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하고 싶을 때


"엄마, 그냥 하고 싶을 때 하면 되잖아."


어느 날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아, 그렇구나.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거였구나. 너무 간단한 방법에 할 말을 잃었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보러 가고, 떡볶이가 먹고 싶으면 떡을 사 오든 사 먹든 하면 되는 거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미리 정해놓고 틀에 끼워 넣으려고 했다. 뭔가 하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을 몰랐다.


 '바다가 어딜 가냐? 다음 주에 시간 봐서 가면 되지, ' 바다는 항상 그 자리에 있겠지만, 나의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러 갈 수 없는 중대한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보통은 별일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미루고 또 미룬다. 대게는 당장 후회할 만한 일도 생기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미루지 말고 그냥 할걸.' 싶은 거지.


때로는 계획적으로, 때로는 즉흥적으로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혹은 계획을 변경했기 때문에, 조금은 촉박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유가 없는 시간을 여유롭게 넘길 수 있는 관록이 없다. 겪어봐야 알고, 알아야 느는 건데 경험 부족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순서다. 나는 이제야 그것에 조금 다가섰다. 해결책을 제시하고, 부딪혀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금씩 되는대로 해보는 거다.


모든 일상을 즉흥적으로만 살 수도, 계획적으로만 살 수도 없다. 다음 주에 보는 바다가 오늘보다 훨씬 더 시원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기다린 만큼 큰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계획에도 무계획에도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 중요한 일에서까지 즉흥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일상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 것은 그때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도 좋지 않을까. 당장 하던 일 전부 내팽개치고 나가는 것만 아니면. 가끔은 그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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