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 39와 바다사자
별별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지나 인파에 휩쓸리며 가다보니 39번 부두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부두 한쪽에 특별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발 아래 바다로 모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바다사자가 그곳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곳이란다. 부두 끝으로 가자 바다에 너른 평상이 보였고, 그 평상 위에는 게을러 보이는 바다사자들이 무리를 지어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TV 속에서만 보던 바다사자가 한두 마리도 아니고 떼를 지어 있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다사자는 등치도 제법 커서 웬만한 녀석들은 황소만 해 보일 지경이었다. 성체가 된 바다사자는 느긋하게 햇살을 즐기고 젊은 녀석들은 사냥 연습인지 저희들끼리 몸을 부딪치며 평상에서 서로를 밀어내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 식으로 하면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고 응원이라도 해야 할 것은 분위기이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조용히 바다사자를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큰 소리를 치면 바다사자가 놀랄까 염려하는 듯 했다. 얼마 후 바다에서 유람선 한 척이 접근해 왔는데 조금 멀기는 했지만 유람선에 탄 얼굴 윤곽을 보니 아마도 동양 사람들로 보였다. 바다사자를 보자 얼마 전 보도를 통해 본 백령도 연안의 물범이 떠올랐다. 바다 위로 봉긋 솟아오른 작은 바위 위에 서로 먼저 올라가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물범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고, 나이 어린 녀석들은 아예 햇살을 포기하고 주변에서 물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곳에도 이곳 샌프란시스코처럼 평상 같은 것을 만들어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바다사자 서식지를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그곳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건 모두의 자원이라고 보는 듯 했다. 아마도 러시안 힐을 오르는 동안에도 먹거리나 기념품을 파는 곳을 보지 못한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라 생각했다. 참으로 대국다운 대범함이라고 할까? 오스트리아의 할슈타드 같은 곳의 멋진 호수를 볼 때도 같은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건 우리나라만 유별난가 싶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산세가 좋은 곳은 어디 할 것 없이 입산료를 받는다. 어떤 곳은 그 산 속에 사찰이 있어 사찰 입장료를 덧붙여 받는 곳도 있는 지경이다.
바다사자를 구경하고 38번 부두로 다시 돌아 나와 그 앞으로 이어진 쇼핑센터로 들어섰다. 풍물거리 같기도 하고, 유원지 같기도 하고 먹거리 골목 같기도 한 천의 얼굴을 가진 상가들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었다. <피어 39>란 바로 이 건물을 이르는 것이다 건물은 2층으로 길게 지어져 있는데 형태는 우리나라의 인사동처럼 서로 이어져 있었고 그 규모가 상당했다.
거리 곳곳에는 지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화가도 있었는데 한 사람을 그리는데 불과 10여 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았다. 그 화가들 가운데는 풍경을 그려주는 사람도 눈에 띠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스프레이로 그림을 쓱싹 그리는데 신기하게도 그림은 매우 정교했다. 스프레이가 주는 투박함은 어디 한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그림만 보면 스프레이로 그렸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한 화가가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의 대부분은 엽서 보다 조금 큰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손톱을 길게 길렀는데 그 손톱을 연필처럼 끝을 잘 다듬었다. 그곳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은 매우 정교했고 또한 화려했다.
언젠가 중국 여행길에 거의 기예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본 적은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니 세상에는 기인들로 넘쳐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슨 기예가 있지? 그저 남 잘 하는 것 쳐다보는 얼빠진 것, 그것이 나의 기예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지친 다리도 쉬고 간단히 요기도 할 겸해서 다음으로 찾은 곳은 <보딘> 이라는 빵집이었다. 100년이 넘게 빵집을 운영하는데 매우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주변에 이르자 구수한 빵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2층 초입에는 빵 집을 상징하는 멋진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유리창너머로 1층에서 빵을 만드는 공정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인천 북성동의 공화춘 자장면 박물관이 떠올랐다. 박물관은 역사일 뿐만 아니라 장인의 자부심이다.
빵에 맥주를 곁들이니 허기도 달래고 맥주 맛도 보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다만 낮술이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리도 좋은 날인걸-
아들 내외는 우리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했다. 그야말로 자식들 덕분에 호강 한번 제대로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으니 술맛이 절로 날 수밖에.-
배가 불러지고 맥주로 기분이 좋아진 탓에 부둣가를 되돌아오는 길이 마냥 즐거웠다. 마침 길에서 신명나게 연주를 하는 흑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신명난 연주며 노래 솜씨 탓에 그 주변에는 다른 곳과 달리 사람들이 켜켜이 둘러서 있었다. 간간히 작은 지폐로 노래 선물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들 녀석이 슬그머니 1달러 지폐를 손에 쥐어준다. 나도 흑인 연주자에게 다가가 지폐 한 장을 팁 통에 넣고 그를 향해 엄지 척을 해주었다. 그도 역시 내게 엄지를 내밀어 보였다. 기분이 다시 두 배로 업 되는 것은 당연했다.
도심 속의 작은 공원, 알라모 스퀘어
마지막으로 알라모 스퀘어라는 작은 공원을 찾았다. 알라모 스퀘어는 공원과 공원 일대 거주 지역을 지칭한다. 더러는 공원 서쪽 일대에 위치한 주민 거주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떻든 공원과 그 주변 지역이 된다.
수령이 오랜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목을 잔뜩 빼고 있었다. 해질녘이 되자 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쉬임없이 불어왔다. 날씨는 다시 어제 오후 날씨를 닮아갔다. 공원의 한쪽에 외관이 비슷해 보이는 주책이 일곱 채 나란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연실 스마트폰을 눌러댔다. 파스텔 색채의 빅토리아 양식 가옥인데 이국적 풍광으로 유명하단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를 상징하는 랜드 마크 같은 곳이기도 하단다.
이들 주택은 개인 소유이기는 하지만 시에서 관리를 하며,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 북경을 여행했을 때 정승이 난 집이라고 하여 마치 민속촌처럼 관리되는 한 주택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도심 한 가운데의 주택 밀집지역에 있었고 주인도 여전히 있었으나 그 집 역시 북경시에서 관리를 하며 집을 판매하지 못 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었다. 집 주인은 시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생활을 한다고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집 덕분에 평생을 무위도식해도 될 판이었다.
공원엔 바람이 가득했다.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여기저기에 무궁화가 심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별로 보이지 않는 무궁화가 이곳 공원 여기저기에서 손질도 받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피어있었다. 그 때문에 별로 볼 폼은 없었지만 이국땅에서 그나마 무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계절별로 온갖 꽃 축제가 다 열리는 우리나라지만 무궁화 축제는 들어보지 못했다. 왜 그런지, 무궁화 축제를 하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지. 나는 한 달 전쯤에 이런 내용의 토론 자료를 모신문사 토론방에 올렸었다. 일본은 벚꽃 축제가 있고 영국에서는 장미 축제가 있고, 네덜란드에선 튤립 축제가 있다면 우리에겐 무궁화 축제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과거에는 학교 운동장에는 어김없이 무궁화가 자라고 있었는데 요즈음은 모두가 자취를 감춘 듯했다. 이러다 무궁화가 기린이나 용처럼 상상 속의 꽃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샌프란시스코를 자동차로 돌아다보니 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했다. 대부분의 도로가 일방통행로였다. 우리는 아주 복잡한 시장 같은 곳이 아니면 일방통행로는 거의 없는데 이곳은 그 반대였다. 웬만한 곳은 모두 일방통행로로 보였다. 복잡한 도로 교통을 해소하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하나 우리처럼 이곳이 초행인 경우 가까운 곳에 목적지를 두고서도 멀리 돌아가야 함으로 다소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자동차가 모두 도로의 한 방향으로만 운행되므로 차량 사고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도 한 방향에만 신경을 쓰면 될 것이고, 운전자 역시 한쪽만 신경을 쓰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왜 안 될까? 수년전 인천에서 아주 복잡한 도로에 일방통행로를 적용한다는 예고가 있었다. 그곳 주민들 특히, 상가 주인들은 결사코 반대를 했다. 생계에 지장을 받는 아주 고약한 제도라는 것이다. 왜 생계에 지장을 받는다고 했을까? 양방향이 아니면 결국 자동차는 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인데 그 경우 일차선에 해단하는 길 반대편 상점은 고객이 들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없으니 아무래도 고객이 줄어들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타당성이 있는 주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든 우리는 새로운 제도에 대해서는 우선 반대를 하고 본다. 해보지 않은 제도이므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위험 부담을 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공적인 일을 위해 사적인 부분을 포기하거나 헌신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건 남의 일이거나 책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해와 용서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야말로 논리의 이중성이고 합리의 교묘한 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