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화의 지름길, 궤변론자와 무지몽매한 대중
고대철학이 태동하던 시기로부터 현재까지 소피스트, 즉 종종 별칭으로 불리는 '궤변론자'는 철학을 나누는 집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곤 했다. 철학사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 직접적인 원인을 찾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서 소피스트의 궤변적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근현대로 시간을 옮겨보아도 소피스트를 대하는 태도는 비슷했다. 근현대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은 불가지론, 회의론이 소피스트의 근본적 시각과 태도라고 보았다.
현재도 소피스트 즉 궤변론자를 향한 비판적 관점은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뱉어내는 말에는 철학이 아예 없거나 철학적 내용이 담겨있어도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수많은 소피스트와 마주치게 된다. 소피스트인 척하는 사람들의 첫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말과 글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이 없는데 철학가인 양 행세하고 청산유수처럼 전개되는 논술과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을 방어하지만 강렬했던 그 첫인상만큼 쉽게 뇌리에서 잊힌다. '속 빈 강정', '빈 수레가 요란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등등의 격언들이 종종 회자되는 것은 시대는 달라도 궤변론자를 경계하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소비스트의 존재가 무의미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다. 소피스트의 특이한 시각이 철학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고대철학이 태동하던 시기의 그리스, 특히 민주주의의 이념이 싹트고 있던 아테네에는 한철학 한다던 '시대의 현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는데 단연 그 무대의 중심에는 소피스트가 차지하고 있었다. 철학이 태동하던 시기였던 만큼 그 당시 자연철학을 논하던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뜬 구름 잡는 논리'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논리전개가 빈약한 철학가나 비 판가 그리고 정치가는 소피스트의 먹잇감이 되었고 대중의 눈앞에서 망신당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그들의 인기는 치솟았다. 아테네시민의 여론은 소피스트의 현란한 술사에 좌지우지되었고 사회는 혼란을 자초했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철학자가 등장했으니 바로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었다. 이 두 철학자는 세대를 이어가면서 목숨 건 소피스트와의 논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소피스트의 역할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논리전개의 방법론적 기초를 만들다는 것과, 자연철학자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때 인간중심의 철학적 사고를 일깨웠다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프라토고라스는 소피스트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철학적 입장은 만물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지극히 사람중심적인 관점이다. 그의 이러한 사람중심적 관점과 논리적 전개로 그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정당화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아무리 소피스트적 입장을 고수하던 초기 철학자들의 공적을 인정한다고 해도 궤변론으로 일관하던 추종무리들로 하여금 소피스트적 사고와 악행은 시대를 이어가며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듯이 괘변론은 대중을 현혹시키고, 진리를 왜곡한다. 소피스트적 사고의 기초를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상황의 옮고 그름을 따짐에 있어 실용적 입장에서 사물과 현상을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세웠다. 또한 소피스트들은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진리를 절대적이지 않다고 보았으며, 수사학과 변론술을 통해 개인의 성공을 중시했다. 이들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철학을 강조했으며, 물질적 이익과 사회적 성공을 중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만약에 이들이 보편적 진리와 사실 그리고 대중의 권리와 이익에 철저히 복종했다면 인류는 훨씬 이른 시기에 유토피아적 사고에 입각한 사회정의를 주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실용주의적 입장은 (사적) 실리주의를 감추기 위한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다. 가장 최근의 역사에서 인류가 목격한 궤변론의 역설은 아마도 나치즘 일 것이다. 나치즘의 핵심적 내용은 'National Socialism 민족사회주의'다. (국가사회주의로 알려진 것과 같은 내용이다.) 국가와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선 민족+국가+국민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며, 주요 산업과 시설의 국유화, 사상적 통일, 적대세력의 응징 등을 전면에 내세워 독재정권의 통치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사회주의적 성격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개념인 반사회주의적 기치를 전면에 내세워 정권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나치주의 정권은 자연스럽게 파시즘의 형태로 재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 뭐 지게 되었다.
나치당이 파시즘통치의 수단으로 독창적인 선전방식을 고안했다. 그 당시에 파격적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연출감각과 선진기술을 사용하여 모든 미디어를 동원하여 대중선동에 매진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치즘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세뇌시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언이설과 혹세무민, 분서갱유와 같은 전근대적 방식이 횡행했지만 반대세력은 오로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소수의 무리였다. 지성인이라 자처하던 종교지도자, 학자와 고위관료들까지 나치당의 일원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류에게는 재앙을 안겼고, 독일과 독일인은 절멸의 위기에까지 이르는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온갖 요설과 비상식적인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비상게엄의 정당성과 비정당성을 논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으로 비칠 정도로 대한민국은 합리적 지성이 실종되었다. 치열한 논쟁이 거듭될수록 인간의 지성은 마비되고 판단력은 흐려진다. 의식은 피로감이 쌓이게 되면 감각이 무뎌지고 인내심을 잃기 때문이다. 사회를 비상식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정치권과 그의 공생관계인 언론이다. 그들이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 합리적 그리고 상식적이다. 전통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통치행위는 시민의 우매화다. 비판적 시각과 예민한 청각을 마비시키고 현혹시키는 것은 통치행위의 주요 수단이고 목적이다. 가장 불행한 존재는 우매한 백성이다. 기술혁명 이후에 우리는 마치 활짝 열린 여론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문제는 소낫비처럼 쏟아지는 정보물량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문제는 쏟아지는 정보공세를 방어할 방법이나 수단을 갖추기에는 우리가 가진 능력은 너무도 초라하다. 대한민국이 처한 본질적인 문제는 전체인구의 삼분지일에 해당되는 '우매한 대중'이다. 여론조사에서 항상 등장하는 30%를 상회하는 극우세력의 지지율은 대한민국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이미 정해졌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어느 지성인의 극우에 대한 정의가 뇌리를 스친다. 대한민국에서의 극우란 '극도로 우매한 집단'을 가리킨다고...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의 극우는 사상적 기반이나 지성적 고뇌의 흔적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좀비와 같이 맹목적으로 현상과 사건에만 휩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무리 지어 다니는 집단을 가리킨다. 정치사적으로는 대한민국을 '대한미국'으로 탈바꿈시킨 집단과 그의 후손들이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어느 사회나 그 구성원 중에는 반역의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근본문제는 일제식민지시기 이후에 단 한 번도 반역의 역사와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성인 그룹에 속한 자들 조차도 극우와 되고 좀비화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극우세력과 그들의 뒷배가 되어주고, 그들이 바치는 단물을 빨아먹는 극우정치인 집단에는 유독 말재간을 호구지책으로 삼는 사람이 많다. 검사, 변호사, 방송인, 교수 등등... 그들이 쏟아내는 말과 글이 합리적이거나 상식적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궤변론자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고 다니는 이상 대한민국의 미래는 초라하기만 하다. 한 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는 것은 아직 좀비화가 되지 않는 30%의 합리적 사고를 가지 시민과, 30%의 상식을 저버지 않고 좀비화되는 것에 주춤하며 머뭇거리는 시민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경제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부디 부화뇌동하지 않기를 당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