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사의 뇌출혈 회복 연대기 6ㅡ기저귀와 배민VIP

《그래, 우리 함께》 무한도전

by 캐롯킴

너에게 나 하고 싶었던 말 고마워 미안해

함께 있어서 할 수 있었어 웃을 수 있어

정말 고마웠어 내 손을 놓지 않아 줘서

힘을 내볼게 함께 있다면 두렵지 않아


그래, 괜찮아 잘해온 거야

그 힘겨운 하루 버티며 살아낸 거야

지지 마 지켜왔던 꿈들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웃는 날 꼭 올 거야

괜찮아 잘해온 거야

길 떠나 헤매는 오늘은 흔적이 될 거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두 번 만에 겨우 소변줄을 떼고

소변통에 소변을 누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다.


사실, 나의 소변팩을 옆에 끼고 다니는 게

여간 창피한 게 아니었다.


내 치부를 사람들한테 다 보여주고 다니는 느낌?


근데 화장실 안 가도 되는 건 편했다.



드디어 콧줄을 떼고 난 뒤에 먹은 첫 환자식.


그냥 흰쌀밥을 조금 떠서 오물오물 오래 씹는데
신기할 정도로 달았다.


환자식을 한 달 동안 먹다가 일반식을 먹었는데
너무너무 맛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근데 그 조금 삼키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
처음에는 사레가 엄청나게 많이 들렸다.


왼쪽으로 씹으면 왼쪽 볼살을 자주 씹는 바람에
밥만 먹고 나면 피가 줄줄 흘렀다.


왼쪽 볼에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볼살을 씹는지도, 피가 나는지도 몰랐다.


그 조금 먹는데도, 내가 사람같이 느껴졌다.
와이프랑 엄청 감격해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매 끼니마다

내가 싫어하는 생선이 너무 자주 나왔다.


건너건너 들은 얘기로는,
식당 안에 수족관이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진짜 문제는 기저귀.


이 나이 먹고 기저귀를 차고 다니려니까
진짜 불편하고 진짜 창피했다.


5월부터 온전히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나한테는 2022년 5월부터 7월까지

기저귀를 찬 기억으로 남아있다.


실제로는 2022년 2월부터 7월까지 찬 셈이다.
누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뇌출혈 재활이 중요하지,
고작 기저귀에 신경 쓰냐고"


데, 치료를 받을 때 선생님들 몸에
기저귀 감촉이 조금이라도 스칠 때마다
엄청난 수치심이 몰려왔다.


다 이해하시는 걸 알면서도 그렇더라.


그 감성(?)을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아직 젊었다.



우선, 병원 복도 간지가 안 나는데다가
기저귀까지 차면 납작 궁둥이가 돼버렸다.


특히, 뒷모습이 영 볼품없고 간지가 안 나더라.
스탠더에 서 있을 때의 뒷모습이란 정말 비참하다.


그리고 기억도 안 나는 내 1살~3살시절.


그때 기저귀를 찬 뒤로
기저귀를 오랜만에(?) 차려고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부부간에 방귀를 튼다는 말은 있어도
X을 튼다는 말은 없다.
이거 진짜 비참하더라.


전국의 100만 영유아들은
(정확한 수치 아님)
용변을 본 상태로 앉고 뛰고 한다니,
엄청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몇 달간의 침상생활로 인해
몸무게는 15kg 정도나 빠지고
(아프기 전에는 80kg, 그 당시에는 65kg,

지금은 다시 80kg)


내 왼쪽 눈은 밖에 돌아다니기 창피할 정도로
항상 시뻘건 색으로 돼있었다.
(2~3월 중환자실에 있을 때
눈을 거의 뜨고 생활해서 각막에 상처가 많다더라)


머리는 짧아서 거울을 보면 마치 좀비 같았다.
왼쪽 관자놀이는
뇌가 부었다 가라앉은 탓에 움푹 꺼져버렸다.
만지면 느낌이 진짜 이상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조금 차올라 있는 상태다.


두개골도 틀어진 것 같았다.
지진이 나고 나면 지각 변동이 생기듯이 말이다.
돌아다니다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부터 그렇게 거울을 보기가 싫더라.
내 얼굴이 어색하고 싫어서.
원래도 잘 안 봤지만.



어느 정도 음식을 수월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나를 다시 살찌우겠다며
와이프랑 ‘살찌기 프로젝트’에 들어갔고,
배달의민족으로 음식을 닥치는 대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또, 영양제 여러 개를 챙겨 먹기 시작했다.
(친한 약사 동생이
엄청 많은 약을 자주 갖다 줬다.
진짜 고마웠다)


상태가 정말 심각했었는데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주변에 계신 여러 명의

좋은 분들 덕분이었던 것 같다.


특히, 그중 최고는 역시나 우리 와이프였다.


항상 장난으로
“포브스 선정,

올해 대한민국이 주목해야 할 간병인”
이라고 놀리지만,
혼자서 나를 간병하느라
1년 가까이 고생이 정말 많았다.


진짜 고맙다.
항상 “고맙다, 미안하다”를 달고 살았다.
를 만나는 바람에 이렇게 찐 고생을 하다니 ㅠㅠ
고맙다, 미안하다보다 더 진심인 말이 있었으면
그 말을 항상 했을 거다.


난 복이 많은 남자다.
단 하나도 공짜인 게 없다.
가족의 사랑 빼곤.


나중에 내가 걸을 수 있게 되면
몽땅 다 갚을 것이다.
치킨, 빵, 우유, 돈가스, 칠리새우,

탕수육, 떡볶이 등등.


그동안 콧줄을 끼느라 못 먹던 음식들을
이틀에 한 번꼴로 시켜 먹었다.


평생 시켜 먹을 거
그 며칠 동안 다 시켜 먹은 것 같았다.


항상 콧줄로 한 가지 맛의 유동식만 먹다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으니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한 달 만에 배민 VIP가 되어 있었다.



소아물리치료 파트에
대학 때부터 친한 여동생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챙겨주고,
이틀에 한 번씩 점심시간 때 와서
신나게 같이 웃고,
나랑 실컷 떠들어주고 난 뒤에 내려갔다.
점심도 같이 먹어주고, 진짜 고마웠다.


내가 지금부터 조금씩 갚아 나갈게!



특히, 디*트39의 인절미 라떼를
우연히 한 번 먹고는 사랑에 푹 빠졌다.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음악인 줄 알고 살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생 헛 살았다.


와이프가 그걸 사 들고 내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소리 질러~~~!!!”


인절미 라떼를 시켜주면,
그 많은 걸 사레도 별로 안 들리고 원샷 때렸다.
초딩 입맛 저격 ㅠㅠ


오죽하면 나중에 디*트39 가게를
하나 차리고 싶다 했을까.


6천 원가량의 인절미 라떼만
며칠간 연이어서 열번 정도나 시켜 먹었으니까,
사장님이 분명히 의아해하셨을 거다.
“이 사람 누구지?”


서비스로 스콘도 받았다.
결국엔, 초고급 텀블러

(검정 고무로 둘러싸인)를 갖다 주셨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안 시켰다.



사장님께 죄송한 얘기지만,
그 고급 텀블러가
침대에서 소변 볼 때 짱이다.


아무리 많이 싸도 넘치지 않는
초특급 대용량 사이즈에,
타격감(?)이 유난히 훌륭하더라.



그로부터 3개월 뒤,
고향에 왔을 때 갑자기 생각이 나길래
오랜만에 사 먹어봤는데,
여름에 먹던 맛을 못 따라갔다.


그땐, 내가 잠깐 뭐에 홀렸었나 보다.


그렇게 2022년의 힘들고 외로운 여름을
둘이서 소소하게,
나름 웃으면서 잘 버텨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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