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사의 뇌출혈 회복 연대기 7ㅡ계속된 도전

《같은 시간 속의 너》 나얼

by 캐롯킴

아무말도 하지마요
더는 안된다는거 잘 알아요
많은 날들이 아무 의미없진 않겠죠
멀어지는 바람처럼


우리 함께한 기억들을 꿈처럼
그렇게 안으면 돼
눈 감아도 잊지 못할 추억의 널 묻고


아무말도 하지마요
더는 안된다는거 잘 알아요
사랑했던 날 모두 사라지진 않겠죠
우릴 스치는 안개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이대로 묻어둘래요 나는요
거짓말처럼 또 하루가 살아지겠죠


떨어지는
같은 시간 속의 너

ㅡㅡㅡㅡㅡㅡㅡㅡ

옮긴 광주 호남권역 재활병원에

적응을 잘 하고 있었다.


여기로 온 지 3개월쯤 뒤인 8월 정도가 되자

기저귀를 떼보기로 와이프랑 결심했다.


엄청 무서웠지만

변기 옆에 휠체어를 비스듬히 대놓고

변기로 옮기는데, 2분 정도 끙끙대며 첫 성공!
와이프랑 하이파이브!


한번 성공하고 나니, 두 번째부터는 쉬웠다.
나름 요령이 생겼다.
한여름에 기저귀를 떼니, 땀띠 걱정도 없었다.
오예. 드디어 기저귀를 뗀다!


선생님들도 다들 축하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게 뭐라고 너무 좋았다.


하나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게
마치 게임에서 퀘스트를

하나씩 깨가는 느낌이었다.
(콧줄, 소변줄, 기저귀)



안 움직이던 오른손이 발병 후 2개월 뒤에는

손가락만 까딱까딱하기 시작하더니

5개월 정도 지나니까

아주 천천히 움직일 수 있게 됐고

그랬던 오른손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게 인간승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치료할 때, 6명의 담당 선생님들과

영양가 하나도 없는 농담을 하고 노는 게

너무 재미있고 좋았다.


막 결혼하신 여선생님 남편분 성함까지 외웠다.
오*재씨.


나랑 대학교 동기 동생과

대학원을 열심히 다니시던

잘생긴 선생님과 하이워커를 잡고

치료시간마다 200미터 정도 복도를 걸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엄청나게 덥고, 힘들고, 창피했지만

엄청나게 좋았다.
보는 사람마다 처음에는 다 울었다.


4개월 만에 다시 걸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항상 앉아있고 누워만 있던 내가 걷다니!
사람은 역시 걸어야 돼. 이제야 사람같았다.



근데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을 때

얘가 말을 잘 안 들었다.


보폭을 크게 가져간 탓에

오른발가락이 자꾸 앞 바퀴를 걷어찼다.
조절이 잘 안 됐다.


열심히 걷고 있는데

어떤 이모가 지나치면서 내 선생님께 하는 말.
“아이고, 힘든 환자 맡아서 선생님이 고생이네요.”


그렇게 말을 밉게 하시는 분들이

어딜 가나 꼭 한 명씩은 있었다.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난 지금

그 이모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이모에게 받았었던 상처는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지인들과 면회도 자주 했는데

보자마자 우는 분들도 많았다.


나는 이제 울 거 다 울었는지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섬망이 있을 때라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었다.
‘저 사람 되게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되게 여린 사람이었구나’


3년 반이 지난 지금,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나를 보자마자 울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마움을 느낀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따금씩

내가 먼저 카톡이나 전화를 한다.



양쪽 어깨가 120도 정도밖에 안 올라가서

2주에 한 번씩 화요일만 되면

담당 과장님께 양쪽 어깨에

3방씩, 총 6방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는데

진짜 싫었다.


하지만, 나는 뇌출혈 시술도 견뎌낸 사람이야.
이제는 뭘 하든 간에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내 귀에 들렸으니까 말이다.


바늘을 뒤에서 찌르셔서

바늘이 언제 들어올지도 몰랐다.
어깨 속으로 약물이 들어오는 묵직한 그 느낌.


고등학생 때 맞아보고 나서

오랜만에 느끼는 그 느낌.
참, 멜랑꼴리했다.


지금은 두 어깨 모두 170도 정도 올라간다.


포경수술을 하고 나면

아이한테 돈가스를 사주듯이,

주사를 맞고 주사실을 나서기만 하면

그때마다 1층 매점에서

와이프가 맛난 거를 사줬다.
화가 조금 가라앉았듯했다.


이 여자, 나를 너무 잘 안다.
무서울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심하게 지쳐 보이는 얼굴을 한

조선족 간병 이모가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와 격앙된 목소리로

전화통화하시는 걸 듣고 너무 많이 웃었다.


“내가 오늘 기저귀를 가는데
개씹썅똥꾸렁내가 나서 혼났다야.”


기저귀를 갈다 보면 그럴 수도 있을 텐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많이 나 보이셨다.


그 옛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서 기뻐했듯이

왠지 모를 문화충격과 희열(?)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 신선하고 날것 그대로의 느낌은 뭐지?’


이상하리만큼 신선(?)했다.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그 느낌이 안 살았다.
역시 원조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ㅋㅋ


그 특유의 연변 억양과

처음 듣는 듣도 보도 못한

정제되지 않은 욕 때문에

그 옆을 지나가다 웃참 실패.


그렇게 엄청난 빅재미를 준 아줌마께 감사했다.



복도 끝 통창 너머로 보이는

사촌 형네 아파트 단지가

처음에는 복시 때문에 안개가 낀 듯이

흐릿하게 보이더니

2달, 3달 지나다 보니까

점점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입까지 안 갔는데 점점 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왼쪽 눈 충혈이 너무 심해서

외래로 안과에 가게 됐다.


그때가 2022년 8월 초쯤이었을 거다.


고맙게도, 소아 물리치료하는 동생이

반차를 써줘서 같이 가줬다.


내가 신던 신발과 사복을

4개월 만에 착용한 뒤에 차에 올라탔다.


병원복이 아닌 사복을 입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감옥에서 몇 달간 복역하다가

깐 사회로 외출한 것 같았다.


동생은 나를 밖에서 들어주고,

와이프는 차에 미리 탄 뒤에 끌어당겨줘서

차에 겨우 올라탔다.


와이프가 조용히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이렇게 5달 만에 차에 타게 되다니

실감이 안 나서 기분이 너무 좋단다.


내가 영영 차에 못 타게 되는 줄 알았다네.


차에 타서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 적재 노래를 반년만에 들었다.
더 구슬프게 들렸다.


추억 가득한 광주시내 거리를 지나

30분 정도를 달려서 전대병원 옆에 있는

파랑새안과에 도착했다.


밖에 보이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안 쓰네?
실외마스크가 해제됐다고 했다.
신기했다.


아프기 전에 걸어 다닐 때는 몰랐는데,

보도나 건물에 턱이 왜 이렇게 많은지,

겨우 갔다.


보이는 사람들마다 왜 이렇게 눈을 피하게 되는지.
공황장애가 이런 건가 싶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도 사람들과 대화할 때

눈을 잘 못 쳐다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시력 1.5가 안과를 가게 될 줄이야.
태어난 뒤로 안과에는 처음 가봤다.
신기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안약을 들이부으라고 하셨다.
왼쪽 눈은 감각이 없어서

안약을 넣는지도 몰랐다.



차에 다시 타

무등산 산장 드라이브 코스를 갔는데,

비가 온 다음 날이라 그런지

창문을 여니 코로 느껴지는 풀내음이 예술이었다.
맑은 하늘도 예술이었다.


내가 길을 너무 잘 알자

와이프가, 누구랑 와 봤길래 이렇게 잘 아냐고 했다.
“우리 가족끼리 10년 전에 와 봤잖아ㅠㅠ”


까페에 들러서 음료수를

테이크아웃한 뒤에 차에서 마셨다.


와이프가 말했다.
“살길 잘했지?”


진짜 그랬다.
다 나은 것만 같았다.


병원에 다시 들어가서 병원복으로 갈아입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바깥보다 병원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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