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e》 임창정
더 이상 미련은 내겐 없어
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
그 동안 추억 간직하겠어
너에 대한 마음도 간직하겠어
왜 시간은 항상 아쉬울 때
끝나는 걸까 오 나만 그런 걸까
왜 시간은 항상 행복할 때
끝나는 걸까 나에게만 그런 걸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남기고
한 달 만에 더 큰 병원인
광주 호남권역 재활병원으로 옮겼다.
가는 날, 선생님들 열 분 정도가
문 앞까지 나오셔서 배웅해 주셨다.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병원 덕에 많이 좋아지신 거
절대로 잊으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년병장은 두 번째 전역을 했다.
그렇게 4월 말, 스트레처 카에 실려
비를 맞으며 응급차에 탔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흐린 날씨였는데,
병원을 나서서 응급차를 탈 때까지의 찰나의 순간
흐린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던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지는 느낌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응급차를 타고 20분이나 달렸을까.
도착한 뒤에 응급차에서 내려서
담당 과장님을 뵈러 갈 때도
스트레처 카에 누운 채로 이동했다.
어색했다.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열 배는 더 크게 느껴졌다.
병실 5층 1인실에 자리 잡은 그 첫날.
너무 어색했고, 갑자기 현실을 깨닫자마자
엄청난 공포감이 밀려왔다.
'여기가 어디지?'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한 번씩 현실을 깨달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아버지께서 짐을 다 정리하고 가실 때
또 나만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죄송하고 사랑해요.”
맨정신에는 절대 못 할 낯뜨거운 말을
그렇게 얼떨결에, 쇳소리로 말했다.
평소에는 그런 말 절대 못 하면서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었는지.
한 8월까지는 발병한 지 6개월이라
급성기에 포함돼서
자고 일어나면 변화가 눈에 보였다.
배운 그대로였다.
휠체어 발받침 위로 발을 못 올렸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되더라.
너무 신기했다.
새 병원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이한
어린이날이던 5월 5일.
장인장모님과 아이들이 면회를 왔는데
또 나 혼자 꺽꺽대면서 울었다.
아이들이 평소에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닌텐도를 하나씩 사줬다.
사실, 나도 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껑충 뛰는 걸 보니
내가 다 날아갈 듯 기뻤다.
아이들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한테
“감사합니다, 아빠” 하며
볼뽀뽀를 해줬다.
너무 좋았다.
이 병원에서는
내 대학교 동기 동생이
“형, 형” 하고 부르며
열심히 치료해 줬다.
고마웠다.
선생님들이랑도 금세 친해져서
맨날 장난을 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말도 잘 못 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대화가 됐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때는 섬망이 심했을 때라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난 칠 생각만 했었던 것 같다.
2022년 5월,
콧줄과 소변줄을 빼기로 했다.
콧줄을 뺄 때는 무슨 마술을 하는 줄 알았다.
계속 나왔다.
연하 검사는
다행히 두 번 만에 2단계까지 통과했다.
1단계는 요플레,
2단계는 쌀밥이었고
그걸 한 번에 잘 삼키는지
엑스레이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확인하더라.
뭔가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때마다
게임 미션을 통과하듯 기뻤고,
그때마다 와이프랑 하이파이브를 했다.
문제는 소변줄이었다.
시원하게 뺐는데 소변이 안 나와서
초음파로 방광을 확인하더니, 잔뇨가 있다면서
새로 다시 껴야 한단다.
세 달을 소변줄에 의지했더니
소변이 나오기 직전의 느낌을
뇌가 까먹은 듯 보였다.
와, 근데 이거 진짜 아프더라.
장난 아니었다.
엄청 크게 악을 질렀다.
그 긴 소변줄을 한 번에 무자비하게 끼우던
덩치 큰 남자 간호사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소변줄을 다시 끼운 그날 밤,
요로 감염 때문에
고열 40도로 꽤나 고생했다.
진짜 몸이 벌벌벌 떨리더라.
분명 엄청 아프고 힘든 상황이었는데,
뇌출혈을 겪었을 당시의 통증에 비하면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느껴졌다.
거짓말이 아니라
고열로 몸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더라.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