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사의 뇌출혈 회복 연대기 10ㅡ후회와 다짐

《꿈에》 박정현

by 캐롯킴

어떤말을 해야하는지

난 너무 가슴이 떨려서

우리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고 있네요

이건 꿈인걸 알지만

지금 이대로 깨지않고서

영원히 잠잘수 있다면

날 안아주네요. 예전 모습처럼

그동안 힘들었지 나를 보며 위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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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병원에 오니 삶이 많이 달라졌다.
병원이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라서

집에 자주 갈 수 있게 되었다.


광주에 있을 때는

2주에 한 번씩 주말에만 잠깐 보고 와서
아이들이 항상 서운해했었다.
물론 와이프만.


또 여기는 광주와는 다르게

보호자가 그다음 치료가 있는 곳으로
안 데려다줘도 되어서

통으로 3시간 정도가 비었다.
너무 좋았다.


와이프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게 되니

마음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제 와이프한테 조금 덜 미안해해도 되는구나.


와이프는

내 역할도 하랴, 간병도 하랴, 애들도 키우랴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집에 가서 옷 빨래도 자주 하고,
동사무소 가서 볼일도 보고,
가볍게 동네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내가 와이프를 위해

뭔가 해 준 것 같아서
너무너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를 맡으신 선생님 네 분 다
평소에 친해지고 싶던 선생님들이라

내심 기뻤다.


한 분은 우리 와이프랑 성격이 비슷해서

너무 재밌었고,
한 분은 개그 감이 살아 있어서 얘기하는 게

너무 재밌었다.


그중 한 분은 6년을 같이 일했었던 터라
편하게 대화하면서 치료했다.


이 친구가 이렇게 정 많은 친군 줄

그동안 전혀 몰랐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들 다 그랬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사람들을 워낙에 많이 만났었다 보니,
저 사람이 나에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몇 마디만 나눠 보면 쉽게 구별이 됐고,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행동거지만 대충 봐도 알았다.


내 선생님들은 다들 좋은 사람들이다.
나는 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같이 일한 지난 6년의 세월보다
4개월 동안 치료하면서 얘기한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6년 동안 술도 자주 사주고

이것저것 많이 해 줄 걸.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데다 워낙에 스크루지라
다른 사람과 고루고루 친하지를 못했다.


나는 나한테 돈 쓰는 걸 진짜 싫어했고,
마트를 가도 항상 최저가 상품만 구매했다.


술에 아무리 취해도 택시비 몇천 원이 아까워서
1시간 거리의 집까지 걸어 다녔고,
기름값이 아까워서

차가 아닌 스쿠터를 타고 다녔다.


친해지고 싶은 직원한테
짝사랑처럼 몇 번을 말 걸까 말까 하다가
포기한 적도 많았다.


근데 한 번 크게 아픈 뒤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기로.


그동안 친해지고 싶었다.
선생님은 진짜 좋은 사람 같다.
선생님은 분위기 메이커다.
선생님 향기가 너무 좋다. 등등.


그 대신, 안 좋은 얘긴 절대 안 하고 좋은 얘기만.


습관처럼 계속 하다 보니 쉽게 술술 나왔다.
진작 이렇게 살걸.


이렇게 살아보니까
아프기 전보다 훨씬 더 재밌더라.
지난 과거가 후회됐다.


선생님들이랑 친해지면 장난기가 심해서
영양가 1도 없는 얘기를 자주 했다.
나는 진지한 얘기보다 이런 얘기가 너무 좋다.


이런 얘기를 할 때만큼은
내가 환자란 걸 잠깐 잊어버린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너무 무겁고 진지한 얘기는

공기를 혼탁하게 만들어버려서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하게 만들어버린다.
(이게 진지한 얘기 아님?)


그리고 꼰대 소리, 진상 소리 듣기 싫어서
누가 질문하기 전까지는
심도 있는 얘기를 절대 안 한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떤 정보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는 건
상대방으로 하여금
시간 낭비와 감정 소비를 하게 만든다.


이 생각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라
무조건 지킨다. 스몰토크는 제외다.



나는 50가지가 넘는 후유증을

가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럽지만,

겉으로는 티가 거의 안 나서
그냥저냥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남들한테 말해봤자 아무 소용 없는 걸

깨달은 이후로
남들한테 얘기 안 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감히 예상해 보건대, 어떤 사람이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증상들을

단 30초만이라도 겪게 된다면
너무 무서워서 울어버릴 거다.
“어어어...이게 뭐야...” 하고 말이다.


이 많은 증상들과 4년 가까이

동거하고 있는 내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적고 나니 환자들이 얘기하던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따로 없네.
심지어 나는 걷지도 못하니
‘앉아 있는 종합병원’이려나.


근데 와이프한테 배운 건데,
누구한테 내가 겪는 통증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이를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니고
어지간한 거는 다 참을 수 있다.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낫지도 않는다.


나라도 맨날 저렇게 얘기하는 환자가 있으면
좋지 않게 볼 것 같다.


분명히 담당 치료사는
나를 어떻게 치료할지 다 생각하고 왔을 건데
환자가 이런저런 얘길 하면 다 꼬여버린다.
나도 그랬었다.


한번 치료사가 배정되면, 믿고 따라야 한다.
나도 도수치료만 10년 넘게 했다뿐이지,
재활은 선생님들이 더 전문가다.
어설프게 알거나 모르면 조용하자.


환자에게 공감해 주는 치료사가 1등.
공감이 안 가더라도

잘 들어주는 치료사는 2등.
환자가 얘기하는 모든 걸

부정하는 치료사는 꼴등이다.


적어도 꼴등은 하지 말자.


많은 증상 중에서

특히 왼쪽 안구 통증은 진짜 참기 힘들다.
사실 걷는 것보다
이 안구 통증이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너무 고통스럽다.


또 한 가지 더 바라는 게 있다면
혀 마비가 풀리고 성대가 돌아와서
예전처럼 노래를 마음껏 하고 싶다.


막걸리 한잔, 홍시, 김광석 노래 등.
맛깔나게 부를 자신 있는데...


사실 내가 노래할 때면 와이프가 가장 좋아했었다.
노래 부르는 게 너무 맛있다고 좋아했었다.



내가 목 디스크, 허리 급성 염좌,
좌골신경통, 오십견, 두통, 낙침,
사타구니 통증, 팔 저림, 족저근막염 등
수많은 근골격계 통증을 많이 겪어봤지만
다 견딜 만했는데,
이 뇌출혈 후유증은 진짜 버티기 힘들다.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뇌출혈은 안 겪었으면 좋겠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것 같다.


그나마 하나 다행인 건
내 가족이 안 겪고 내가 겪어서 천만다행이다.


이걸 와이프나 아이들이 겪는다고 상상하면
정말 끔찍하다. 차라리 내가 참고 말지.
내가 아픈 건 참겠는데,
우리 가족이 아픈 걸 보는 건 도저히 못 참겠다.



이 기분은 마치 어둡고 긴 터널 한가운데를
나 홀로 덩그러니 걷고 있는 느낌이다.
진짜 외롭게 혼자 싸우는 느낌이다.


통증은 극히 주관적이라
아픈 당사자만이 아는 고통이다.


두통이나 복통 같은 흔한 통증이 아니라
이건 나도 처음 겪어보는 생소한 통증이라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다.


누구한테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거다.
오롯이 혼자 참아야만 한다.


군대는 전역 날짜가 정해져 있어서
버티다보면 언젠가 끝나지만,
이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진짜 무섭다.


한 가지 희망은 내가 보통 환우들보다는 젊어서
남들보단 회복이 좀 더 빠르다는 것.
어르신 환자들은 어떻게 버티냐 ㅠㅠ


나름 젊다고 생각하는 나도

이렇게 힘들고 무서운데.
진짜 대단들 하시다.


보호자분들도 너무 고생이 많다.
고맙다. 미안하다. 표현을 해야 사람은 안다.
아끼지 말자.



앉아 있다 보면 별의별 환자분들이 많이 보인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시는데도
워커를 끌고 다니시는 분.


인지가 안 좋으셔서 화를 자주 내시는 어르신.


앞이 잘 안 보이고 제대로 걷지를 못하는 학생.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리셔서 욕을 자주 하시는 분.


볼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안 좋다.


저렇게 힘든 분들도 조용히 따라가는데
내가 엄살 부릴 순 없다.


또, 내가 이렇게 마음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건
여러 사람들의 희생 덕분이다.
맘 놓고 입원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복이다.


걷고 뛸 수 있는 건 진짜 큰 행운이다.
아프기 전엔 몰랐다.



나는 노래방에서 헤드뱅잉 하는 것도 좋아했고,
미친 듯이 춤 추는 것도 좋아했고,
걸을 때 장난으로 문워크 자주 했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걸 좋아했고,
멀리 뛰고, 높이 뛰는 걸 좋아했었다.


그래도 나는 아프기 전까지 재밌게 실컷 놀아서
조금은 덜 억울했다.


프리다이빙, 보드, 기타 학원, 복싱,
음악 학원, 동료와 해외여행 등
모두 다 허락해 준 내무부장관님께 고맙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순 없을 것 같다.


그저 우리 애들 자전거만이라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냥 몇 년 전을 생각해 보면 꿈 같다.
그땐 내가 행복에 겨웠었다.


습관처럼 “행복하다”를 입에 달고 살았었으니...
이른 나이에 아이들을 낳아서 키우느라 와이프랑 힘들다가
이제야 좀 놀 만했는데...


지방이지만
새집, 새차, 예쁜 와이프, 예쁜 딸, 잘생긴 아들까지
남 부러울 게 없었는데
이제야 좀 즐기나 했는데, 너무 아쉽다.



아프기 몇 달 전에 애들이 그랬다.
엄마랑 등산도 가고 술도 한잔 하고 오시라고.
그 상황이 너무 신기하고 그랬다.
언제 이렇게 다 컸니.


처음으로 집에 아이들을 놔두고
와이프랑 강천산으로 등산을 갔는데
실감이 안 났다.


4시간이나 집을 비워도 괜찮았다.
걱정돼서 전화했더니 있을 만 하다며
술 한잔 하고 들어오시라네 ㅠㅠ 캬~~
애들을 일찍 키워놓으니 이 맛이구나.



지금도 한 번씩 친구들과 소주 먹으러 가고
신나게 운동을 하는 꿈을 자주 꾼다.
깨고 나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꿈이었음 한다.
날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게 꿈 같다.



작년 9월 우리 딸 생일파티 때
선물 뭐 갖고 싶냐니까,
선물은 다 필요 없고
아빠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오기나 하란다.


나는 하루하루 사는 게 아니라
악착같이 버티는 중이다.


우리 가족을 위해 나는 열심히 해서,

되도록이면 올해 안으로 걸어서 집에 갈 거다.
(2023년에 쓴 글인데, 2026년인데도 나는 아직 병원에 있다.)



나는 딸과의 약속은 어지간하면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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