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 아웃사이더
달빛은 알아줄까 외로운 이 밤을
별빛은 알아줄까 상처받은 맘을
괴로움이 사무쳐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움에 파묻혀서 그대를 부른다.
난 여기에도 저기에도 어디에도 섞이지 못해
너에게도 그녀에게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해
주위를 서성거리며 너의 곁을 맴돌아.
(곁을 맴돌아)
ㅡㅡㅡㅡㅡㅡ
나름 열심히 운동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아프기 바로 직전까지
매일 헬스장에 가서 빡세게 개인 PT를 받으며,
식단도 지키고 땀 흘리면서 운동했었던 나였다.
운동을 빡세게 하고 싶어도 걸을 수가 없으니
운동을 빡세게 할 수가 없었다.
땀을 한바가지 흘리면서
등산을 가거나 런닝머신을
정신없이 뛰고 싶었다.
나는 술도 별로 안 먹었었고, 담배도 끊었고,
운동도 거의 날마다 했고,
심지어 혈압도 저혈압이었는데
내가 뇌출혈이라니.
너무 억울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래도 아이들이 갓난아기 때
안 아파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 아팠으면 진짜 힘들 뻔했다.
지금은 좀 커서 그런지 나를 많이 이해해 준다.
이도 닦아주고, 얼굴과 발도 씻겨준다.
심지어 딸은 소변통까지 비워줬다.
창피함과 동시에 기특함이 느껴졌다.
정말 많이 놀랐다.
언제 이렇게 컸니.
진짜 금방이네.
뇌출혈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으니,
약간이라도 전조 증상이 있을 때
병원을 가본다든가,
뇌 MRI를 한 번씩 찍어본다든가
(이게 진짜 어려운 것 같다),
혈압 관리를 잘한다든가,
운이 좋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도 2022년 2월 19일에
뇌출혈이 오기 며칠 전부터
왼쪽 혀가 얼얼해서
2월 19일에 큰 병원에 가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2월 19일은 토요일이었고,
내 환자 예약이 꽉 차 있던 터라
검사 날짜를 다음 주로 미뤘었다.
예전엔 장례식장에 갔을 때
호상이면 떠들고 웃으면서
고스톱을 치고 노는 모습이
이해가 안 갔었는데, 이젠 알겠다.
80, 90세 드실 때까지
크게 안 아프고 살다가 가시는 게
큰 축복이라는 걸 말이다.
그건 지극히 행복하고 바람직한 이별이다.
나는 2022년을 절대 못 잊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검사하러 바로 갈걸 하는
후회가 많이 된다.
주식 할 때처럼 항상 껄무새가 돼서 말하고 있다.
왜 내 인생은 항상 껄, 껄, 껄, 껄무새인가 ㅠ
의심될 때 바로 가야 한다!
터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자.
그냥 아말감으로 때우면 될 것을
괜히 방치해서 임플란트까지 하지 말자.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 하나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냥 괜히 미안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누운 채로
잘 움직이는 왼쪽 발목을
실컷 돌리는 것뿐이었다.
오른손은 2022년 4월에는
손끝만 까딱까딱 하더니,
8월에는 팔이 160도 정도까지 올라갔다.
급성기의 위력을 제대로 체험할 수가 있었다.
문제는 오른쪽 발목.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도무지 꿈쩍을 안 했다.
만약, 움직이면 와이프가 외제차를 사준다고 해서 필사적으로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질 않았다.
제길 ㅠㅠ
왜 운전은 오른발로만 해야 되는 거야...
왼발로 할 순 없는 건가?
아, 맞다. 나 두 개로 보이지...
외제차를 산다고 해도,
오른쪽 발목이 잘 움직인다고 해도,
어차피 운전은 물 건너간 셈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 외제차.
수간호사님께서 날마다 들리셔서
어제는 뭐 먹었냐고 물어보셨다.
기억력을 좋아지게 하려고 그러시는 것 같았다.
엄마가 나 대신 대답해 주다가
혼나신 걸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또 어떤 젊은 남자 간호사분은
나한테 스타크래프트 좋아하시냐고
물어봐 주기도 하셨다.
롤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는 걸 보니
나이 꽤나 드셨나 보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말 걸어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오실 때마다 간식을 챙겨 드렸다.
“밖에 선생님들 계실 때는 먹기 힘드니까
언능 여기서 먹고 가세요.”
밖에서 혼자 먹다가
걸리면 미움 받을까 봐 그랬다.
전원하기 전날이던 2022년 9월 6일.
와이프가 갑자기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와이프는 어머니랑 교대하고
짐들을 넣은 캐리어를 밀고 아침에 급히 나갔다.
며칠 있다가 군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엄청 슬펐다.
침대에 누워서
잘 움직이는 왼발로 침대를 계속 걷어찼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계속 문자로 미안하단 말만 했다.
오랜만에 눈물이 났다.
그렇게 와이프 없이
부모님과 2022년 9월 7일에
광주에서 내가 일하던 군산 병원으로 가게 됐다.
친하게 지냈던 여자 선생님께서
누텔라 과자 한개를 주셨다.
너무 고마웠다.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4개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막상 헤어지려니까 너무 아쉬웠다.
나는 유독 이별에 취약하다.
‘여기를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천상 F인 사람으로서
내 안에 숨어 있던 감성돔들이
스멀스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담당 과장님, 여러 명의 선생님들,
간호사 선생님들 모두에게
선물을 챙겨 드린 뒤에 아버지 차에 올라탔다.
내가 일했던 군산 병원의 모든 선생님들은
내가 오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나는 마치 사자떼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한 마리의 톰슨가젤 같았다.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내가 일하던 병원에 도착해 보니까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7개월 전에 내가 여기서 아팠던 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틀거리면서 형님 차에 올라탔을 때 그 기분.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선생님들과
원장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새 병실에 들어갔다.
여기가 앞으로 오래 있을 새 병실이구나...
아프기 전까지 이 병원에서 7년을 일했다 보니
다들 가족 같았다.
오랜만에 내 집에 온 것 같았다.
모든 게 익숙했다.
복도도 치료실도 선생님들도 말이다.
내가 있을 병실은 병원 이사님께서 약 2년 전에
신장이식 수술을 하신 뒤에
입원하셨었던 그 병실이었다.
그때 내가 면회를 왔었던 그 병실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럴수가...
마음이 편한 건지 무서운 건지 계속 헷갈렸다.
그래도 다들 반가워해 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나는 단 7개월 만에
도수치료실 김 실장에서
한 명의 뇌출혈 환자가 돼서
이 병원으로 다시 오게 됐다.
치료사가 아닌 환자로 말이다.
내가 치료할 때마다 만지던 병원복을
내가 입게 되다니.
기분 진짜 이상하더라.
가을 날씨가 선선하니 소름 끼칠 정도로 좋았다.
여기서 언제쯤
가짜 집이 아닌 진짜 내 집으로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