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대로》 처진 달팽이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알지 못했지 그땐 몰랐지
이젠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힘들었던 나의 시절 나의 20대
멈추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너의 길을 가
주변에서 하는 수많은 이야기
그러나 정말 들어야 하는 건
내 마음 속 작은 이야기
지금 바로 내 마음속에서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그대 믿는다면
내가 이 글을 쓸 때
왼손으로는 스마트폰을 꼭 잡은 채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만 쓰는데
왼손은 엄청 흔들리고
오른손 엄지는 경직 때문에
자꾸 구부러져서
쓰기가 진짜 힘들다.
또, 경직된 탓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엄청 무겁게 느껴진다.
또, 앞을 볼 때의 눈은 약간의 복시가 있어서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며 쓰고 있다.
글 하나를 쓰는 데 2시간 정도가 걸린다.
(2023년도에는 4시간 정도 걸렸었다)
그렇게 쓰기 힘든데도
뇌출혈 극복기
(2023년 1월부터 2024년 12월까지는
내 블로그에다가 이 이름으로 썼었음)와
나만의 치료 비법들을 쓰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치료를 쉰 지 4년 정도 되다 보니까
치료법을 많이 잊어먹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치료법을 더 이상
잊어먹지 않기 위해서 쓰는 거다.
예전에 일했을 때 단 며칠만 쉬다 와도
치료가 손에 안 익고, 힘들었었는데
일을 쉰 지가 4년째다 보니
상당 부분이 가물가물거린다.
그래서 10년 넘게 열심히 배우고
치료하면서 터득한 걸 잊어먹을까 봐 두렵다.
내가 실력이 엄청 출중한 건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3년 차 때 알려주는 스승님 한 분을 만나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을 혼자 끙끙대며 알아내야만 했다.
실패를 정말 많이 했었다.
12년 동안 부러뜨린 갈비뼈만 해도 3개가 넘는다.
이것 말고도 흑역사가 많이 있다.
부산의 장님 치료사 선생님.
(진짜 신기했다. 만져만 보고도
어떻게 틀어져 있는지를 다 알아내셨다)
(치료받고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일산의 카이로프랙틱 고수 선생님.
전주, 익산, 진주, 서울, 광주, 대전 등
모르는 걸 알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막히면 잠이 안 왔다.
공부하다가 깨닫게 됐을 때면
엄청난 물리가즘을 느꼈다.
치료를 받을 때 가만히 앉아서
치료실 안에 있는 여러 선생님들을 보다 보면
열심히 하려고 하는 선생님들이 간혹 눈에 띈다.
그 선생님들을 보다 보면
저년차 때 정말 많이 고생했었던
예전의 내가 생각나서 짠하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
선생님들은 먼 길로 돌아가지 말고
가장 빠른 길로 갔으면 한다.
그래서 책도 빌려주고 그런다. (2023년 기준)
근데, 궁금하지도 않은데 알려주면
꼰대 소리 들을까 봐 최대한 조용히 있는다.
두 번째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을 때
자존감이 채워지고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원래 환자를 치료해 준다거나
가족들을 즐겁게 해 주면서
자존감을 채워가는 타입이었다.
근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져서
뭔가를 해야만 했다.
살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난 아직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사람이다.
치료를 못 하니, 글을 써서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예전엔 집에 있는 접이식 간이 침대를 펴놓고
와이프를 3시간씩 치료해 줬었다.
새벽까지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치료해주니
힘든 줄도 몰랐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심지어 내장까지.
그때마다 하나도 안 힘들고 진짜 뿌듯했다.
근데 이제는 입으로만 치료한다.
나는 오랄 테라피의 대가다.
상담료는 무료다.
세 번째로, 너무 심심해서다.
(운동이나 해, 이 자식아!)(2023년 기준)
넷플릭스, 유튜브도 어지간한 건 다 봐서
시간이 너무 남아돌았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원래 나는 푹 쉬는 걸 잘 못했다.
근데 너무 힘들어서
아프기 전에는 항상 버릇처럼 이렇게 말했었다.
‘어디 입원해서 한 달만 푹 쉬어봤으면 좋겠다.’
지금 4년째 소원 풀이 중이다.
말이 씨가 된다. 항상 조심하자.
주차할 때마다
꼭 장애인 주차구역만 비어 있는 걸 보고
그때마다
‘아, 저기에 주차하면 참 편하겠다...’
지금은 그렇게 원하던 장애인 주차구역에
원 없이 주차할 수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 조심하자.
꿈은 이루어진다.
노홍철 형님은 “난, 럭키가이야”를 입에 달고 산다.
지금은 진짜 럭키가이로 살고 있다.
볼 때마다 너무 멋있다.
진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도수치료는 100m 달리기고
재활치료는 마라톤 같다.
도수치료는 한두 번 안에
조금이라도 호전되는 걸 보여줘야만 한다.
안 그러면 더 이상 안 온다.
하지만 재활치료는
절대 한두 번 만에 호전될 수가 없다.
호전되기까지 진짜 오래 걸린다.
재활치료 선생님들을 보다보면 진짜 멋있다.
나도 예전에 일했었을 때 그렇게 멋있었을까?
역시 사람은 본인 일을 할 때가 가장 멋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치지 않게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 한다.
12시간이 걸리든, 하루가 걸리든 간에
마라톤은 완주만 하면 성공했다고 본다.
나도 무조건 완주할 거다.
얼마가 걸리든 간에.
근데, 특히 발병 후 6개월 정도까지는
폭발적으로 좋아지는 시기라
모든 뇌졸중 환자분들께서
조금 더 힘을 내셨으면 좋겠다.
환자가 인지가 안 좋으면
환자는 편하고 보호자는 혼자서 힘들다.
환자가 인지가 좋으면
환자도 힘들고 보호자는 더 힘들다.
환자는 눈물 나고, 보호자는 피눈물 난다.
결론적으로 이러나 저러나
간병하시는 분은 죽어난다.
그러니까 잘 해야 한다.
항상 고맙다는 표현을 아끼지 말고 하자.
나는 한 달 전부터(2023년 1월 기준)
나 혼자 젓가락질도 하고
(무슨 벤자민 버튼처럼
어릴 때로 돌아가서 에디슨 젓가락을 쓴다)
나 혼자 휠체어를 밀어서
치료실까지 왔다 갔다 하고
(한 5년만 밀면, 상체만 바디 프로필 가능할 듯)
나 혼자 양치하고
(삼각근에 엄청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찬 느낌)
나 혼자 소변 보고, 나 혼자 손 씻는다.
옷도 나 혼자 입고, 단추도 나 혼자 끼운다.
몇 분이 걸리던 간에 말이다.
다 적고 나니까 완전 씨스타가 따로 없네.
다 나 혼자 하네.
근데 나 혼자 하니까, 자존감도 올라가고
와이프를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 주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오랜만에 혼자 하려고 하니까 다 무서웠다.
익숙하던 것들이 모두 다 어색하게 느껴졌다.
신발을 신을 때, 양말을 신을 때
바지랑 티셔츠를 입을 때
오른쪽을 먼저 넣었는지, 왼쪽을 먼저 넣었는지
다 잊어먹었다.
신기하고 무서웠다.
어느 날 걷는 운동을 하는데
양쪽 엄지발톱 안쪽이 너무 아팠다.
잘 때도 너무 아프길래
그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바로
원장님께 수술을 받았다.
아프기 전에는
내가 직접 내성발톱을
주기적으로 관리해 줬었는데
1년 정도를 방치했더니
길어진 내성발톱이
살을 파고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을 수술할 때는 감각이 무뎌서
거의 안 아팠는데
왼발은 마취 주사를 두 방 놓을 때부터
엄청나게 짜릿했다.
오른쪽 팔다리는 감각이 거의 없어서
링거 맞을 때도 거의 안 아파서
엄청 용감해 보였다.
왼쪽 콧구멍도 감각이 없어서
코로나 검사를 할 때도
왼쪽 콧구멍에 쑤시면 하나도 안 아프니
전혀 꿈쩍도 안 해서 멋져 보였다.
몇달 전에 대학병원 갔을 때
왼쪽을 쑤셔 달라고 하고는
멋지게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검사하시는 분이 헷갈리셨는지
오른쪽을 갑자기 쑤셔서
오랜만에 매운맛 좀 봤다.
깜짝 놀랐다.
없어 보이게 재채기도 엄청나게 크게 했다.
‘그래. 이게 살아 있는 기분이지.’
내성발톱을 수술하는 시간은
발 하나당 5분도 안 걸렸던 것 같다.
거침없는 대표 원장님의 손기술에 반해 버렸다.
수술 후 쿨하게 사라지시는 그 뒷모습.
마치 옷에서 코오롱 스킨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참, 하다 하다 내성발톱 수술까지 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0.5cm 정도의 발톱이
고름과 함께 속에서 나왔다.
징그러웠다.
선생님들이 붕대로 감아 놓은 곳에다가
펜으로 귀여운 그림을 그려 주셨다.
그리 싫지 않아서 거절하지 않았다.
걷는 운동을 하려고 일어나면
엄청 높은 곳에서 외줄타기를 하듯이
너무 무서웠다.
뭐라고 느낌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예전에 나는
바이킹을 탈 때도 항상 맨 뒤에 앉아서
두 손을 들고 탔었고
번지 점프와 패러글라이딩을 할 때도
무서웠지만
그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느린 우체통으로 1년 만에 편지가 왔다.
2022년 1월
(다치기 한 달 전)에 우리 가족끼리
무주 반딧불이 박물관에 놀러 갔을 때 써서
느린 우체통으로 보냈었던 편지가
2023년 1월에 1년만에 집으로 도착한 것이다.
그 글을 읽는데
기분 참 이상하더라.
글씨 진짜 잘 썼네, 저때는.
1년 만에 휠체어에 앉아서 보니까
기분이 진짜 이상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초딩처럼 꼬북칩에 바나나우유를 먹으면서
12시까지 안 자고 혼자서 응원했다.
이제는 맥주가 별로 맛이 없었다.
2002년 4강 신화도
내가 응원해서 잘된 것이다.
자뻑? ㅋ
골을 넣을 때마다
옆방 아줌마들 환호 소리가 후덜덜했다.
아저씨들은 코 골고 주무시더라.
이럴 땐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