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사의 뇌출혈 회복 연대기 12ㅡ그리움과 반성

《행복을 기다리며》 윤상

by 캐롯킴

어디인가 하늘끝엔 언제나 푸른 꿈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의 작은 별 하나가 있다


맑은 미소 고운 눈빛 뛰노는 아이들처럼

오래전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작은 별


이젠 찾을 수 없는 걸까

빛나던 햇살의 추억


우리가 숨쉬던 작은 그 곳을

세상이라 했지


변한 것은 없어

모두 그대로 인걸 먼곳이 아니야

가까이 있는 걸


이 병원은 뷰(View)가 좋아서

베드에 누워서도 바깥이 조금은 보였다.
광주는 TV 뷰였는데...
조금은 덜 갑갑했다.
바깥 날씨도 알겠고.


반지하에 살다가 지상으로 이사 온 것 같았다.
비록 십자가 뷰긴 하지만ㅠㅠ


치료실에 있는 스탠더에 서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마트를 보면

내가 저 마트 안에서
장 봤던 게 생각났고,


잘 걸어 다니시는 노인분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고,


담배를 맛깔나게 피는 아저씨를 보면
담배도 끊은 내가 아픈 게 너무 억울했다.



요즘은 스탠더에 안 서고
‘코끼리’라고 불리는 실내 자전거를 타는데,
처음 탈 때는 너무 좋아서 5단계에 놓고
한 번도 안 쉬고 30분 정도나 탔다.


그렇게나 유산소 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1년 만에 땀 흘리면서 운동하니까 너무 좋았다.


거기다가 팔도 같이 운동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코끼리 자전거가 총 2대가 있었는데,
꼭 내가 타는 시간에 앞이 안 보이시는 분이
같이 타셨다.


그분은 신경 1도 안 쓰시는데
나 혼자 필 받아서 경쟁심에

절대로 먼저 쉬지 않았다.


그분이 쉬어야 나도 쉬었다.
근데 사이클 선수만큼 엄청 잘 타셨다.
거의 쉬질 않으셨다.
헐떡거리지도 않으셨다.
찐 고수였다. ㅎㄷㄷ


그렇게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나 혼자 경쟁했다.
허벅지 터지겠더라.


2년 전까지만 해도

숨을 2분 50초도 참았었는데,
지금 참으면 1분이나 참으려나?


지금 보니 오후 2시 50분에
2분 50초를 참았네?


코끼리만 타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평소에 꾸준히 운동하자.



언젠가 혼자 치료를 가는데,
어떤 아줌마들끼리 나를 보면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다 들렸다.


“젊은 사람이 왜 저런데...”


내가 화가 나서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뇌출혈 때문에 그래요. 다 들려요, 아줌마.”


그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속이 통쾌했다.


통쾌하면서도 씁쓸했다.



집에 가면 아무것도 모르는 냥이가
몸통 박치기를 해댔다.
귀여웠다.

얘 덕분에 애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정돼 보였다.
그래서 더 예쁘고 고마웠다.


‘얌마, 아빠가 아픈 건 아냐?’


스트리트 출신이라 먹는 걸 너무 좋아하는
우리 냥이.



집에 가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푹신한 침대도 누워 있기에 너무 불편했고,
화장실에라도 들어가려면 와이프가 낑낑대야만
겨우 들어갈 수가 있었다.


결국 비싼 돈 주고 전동 침대를 구매해서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가 있었다.


집에 가면 눈이 너무 아파서
거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로와 차들, 산을 자주 쳐다보곤 했었는데


내가 음악을 들으면서
신나게 걷는 운동을 했었던 길도 보였다.


지나다니는 차들과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1시간은 순삭이었다.



식탁에 4명이 앉아 오랜만에 식사를 했을 때,
엄청 감동적이었다.
‘다시 여기서 우리 가족끼리 앉아 식사를 하다니’
꿈만 같았다.


딸은 재활하라며
귤을 많이 갖다 놓고 까라고 시켰고,
같이 쎄쎄쎄를 하자고 했다.
잘 안 됐다.


우리 아들은 같이 실뜨기를 하자고 했다.
잘 안 됐다.


아프기 전엔 애들과 자주 했었다.
그땐 제법 잘했었다.



언젠가 ‘금쪽 같은 내 새끼’를 보는데
아빠랑 밥을 먹으러 갔다가
아들이 보는데서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아빠를 먼저 보낸 안타까운 사연을 보았다.


아이가 충격이 커 보였다.
너무 슬펐다.


‘나도, 내가 만약 잘못됐으면
아이들이 엄청 슬퍼했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딸이 자기 전에 얼굴을 씻겨 주고
발도 씻겨 주길래
“아빠가 진짜 미안하고 고마워”라고 했더니
“안 죽고 살아줘서 고마워요, 아빠”라고 했다.


그렇게 무뚝뚝한 딸이 이렇게 얘기하더니
껴안으면서 볼에 뽀뽀를 해줬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이 볼 뽀뽀가 내 인생 마지막 볼 뽀뽀일 줄은.


사랑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살길 잘했다.’



와이프가 코로나에 걸린 게 너무 충격이었는지
불면증이 왔다.
...2주 정도?


등만 붙이면 코 골고 자던 내가 불면증이라니.
실감이 안 났다.


어찌저찌 잠이 들기는 했는데
한 번 깨면 잠이 안 왔다.


처음 겪어보는 불면증.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될 줄 알았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미칠 노릇이었다.


2시에 깨면 아침 8시까지
눈만 멀뚱멀뚱 뜨고 6시간을 버텨야 했다.
복시 때문에 폰도 못 하니까.


진짜 힘들었지만, 이것도 1주일이 넘어가니
어찌저찌 버틸 만했다.


근데 너무나 심심했다.
잠이 안 오면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천장 타일에 난 구멍 개수를 세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계획 짜는 걸 잘 안 했다.
걸어야 뭘 하든가 말든가 하지.
추억팔이밖에 할 게 없었다.


애들과의 수많은 추억들.
쓰러지기 이틀 전에 먹었던 삼겹살과 소주 사진.
쓰러지기 전날 실컷 했던 눈싸움 사진.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과거에 찍은 사진만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 봤다.


메모장에 버킷리스트 10개 정도를 적어 놨는데,
아프기 전달에 한 개는 이루었다.


그건 바로 80kg까지 살찌우기였다.



이따금씩 꿈에, 예전에 치료했던 환자분인
박X은 님이 나와서
왜 그때 자기를 이해 못 해줬었냐며 화를 내셨다.


지금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지신

뇌종양 수술을 하신 40대 초반 여성분이었는데
많이 어지러워하셨었다.


그분의 특이한 점 하나는 이거였다.


높고 뾰족한 빨간 하이힐을 신고

길다란 가발을 쓴 채

항상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는 거다.


친했기 때문에 장난으로
“명품이 많으신가 봐요, 잘 사시나봐요”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들었다.


“큰일을 겪고 나니까
남은 생을 좀 더 멋지게 살고 싶더라고요.”


머리를 맞은 듯 띵했다.
순간 경솔했던 내 태도에 대해서 반성했다.


지금도 생각나고, 진심으로 죄송하다.


무슨 일이든지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절대 모른다.



2024년에 우리 병원에 재입원한 박X은 님께
진심을 다한 사과를 드린 뒤부터는
더 이상 꿈에 안 나오시더라.


2021년에는 하이힐을 신고 오시던 분이
2024년에 다시 봤을 때는
지팡이를 짚은 채로 절뚝거리면서 걸으시더라.


마음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도 다 낫고 나면
옷도 잘 입고, 날마다 머리도 하고 다니면서
멋있게 살고 싶다.


나는 치료하러 갈 때마다
항상 향수를 뿌리고 간다.


향수를 뿌리고 가면 나도 좋고,
선생님도 좋다.


그리고 마치 내가 사회생활이라도 하는 것 같다.


지금도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치료했던 때가
너무너무 그립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나의 리즈 시절 아니었을까?


내가 예전처럼 다시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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