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 치료 실패 경험담 시리즈 3

풍요 속의 빈곤

by 캐롯킴

그렇게 또 6개월 정도를 그 의원에서 일했다.
하지만 내 실력은 제자리.


1년 동안 배운 거라곤, 어떤 강도로 주물러야
더 좋아하시는지 깨달은 것밖엔 없었다.


나이가 가장 많으신 40대 후반 형님께서는
아재 개그에 완전히 푹 빠져 있었고
두 번째로 나이가 많으신 40대 초반 형님께서는
약간의 언어 장애를 갖고 계셨지만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알려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1년 차 막내 형님이 가장 고수였다.


둘째 형님이 알려주신 것도 한참 뒤에 보니까

말도 안 되는 치료법이었다.


검사법은 1도 없던, 수학 공식 같았던 그 말씀.
이럴 땐 이렇게 치료하라는 건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


그게 형편 없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그걸 달달달 외웠었고

깨닫고 나서는 다 찢어버렸다.


결혼 후, 광주에서 군산으로 넘어와서는
집 앞에 새로 생긴

어떤 오픈 의원에 면접을 봤다.


주특기: 카이로프랙틱이라고 적은

자기소개서(흑역사)를 내고
합격해서 나 홀로 실장을 했다.


그때가 딱 2년 차였다.


트리거 포인트라는 기본도 몰랐던 나에게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분은 거의 없었고
환자는 하루에 10명 정도로 뚝 떨어졌다.


광주 의원에서 일했을 때는

선생님들께 편승해서 잘 묻어 가다가
갑자기 다 혼자 하려니까 마음처럼 잘 안 됐고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텅 빈 치료실에서 차들이 지나다니는

창밖의 도로를 바라보며
혼자 들었었던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라는 노래.


이 노래의 전주만 들으면
그때의 한없이 황량했었던 내 마음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못 하는 게 없을 정도로

다 잘한다고 원장님께 말해 놨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출근하고 퇴근할 때마다 눈치가 보여서
매일을 물리치료실로 도망치듯이 숨었다.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도망을 가 버릴까도
몇 번을 고민했었다.


치료가 잘 안 되니, 내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와.. 나중에 우리 딸이 크면

능력 없는 아빠를 보고
얼마나 창피해할까?’


그 생각을 하니 견디기 너무 힘들어졌다.


그때부터 책을 있는 대로 다 사서 읽기 시작했다.
월급 220만 원으로
차도 몰아야 하고, 아이 두 명도 키우려니
책을 살 여유가 없었지만
적은 월급을 쪼개서

어거지로 책을 사서 보기 시작했다.


원장님께서는 언제부턴가

환자가 떨어져서 월급을 주기 힘들다면서
내 월급을 할부(?)로 주기 시작하셨다.

한..세달정도?


원장님께서 갑자기 불러서 가면
지갑에서 20~30만 원씩 현금을 꺼내 주셨다.
기분이 너무 나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매출이 떨어진 것 같아서
찍소리도 못 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받았다.


그때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아니구나.

지금이 최악이구나.


며칠 뒤, 수송동 롯데마트 계산대 앞에서
물건을 한가득 담은 카트에 기대어
계산을 기다리는 사모님을 목격하고 나서는
원장님의 말씀이 다 거짓말이었음을 눈치 챘다.


집 앞에서 아이들 내복을 파시는
원숭이 아저씨라고 불리는 분이

한 번씩 왔었는데
와이프랑 그 포터 앞을

지나가다가 아이들 생각이 나서

트럭 앞을 기웃거렸지만

단돈 5천 원이 아까워서 사지 못했다.


그래도 보들보들한 와이프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더없이 행복했었고
귀여운 아이들을 보면 더 행복했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없어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싼 치즈는 꼭 사서 먹였다.
2012년 가격으로 5천 원이었던 게 기억난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와.. 그때 생각만 하면 정말 아찔하다.
그래도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다.


바르게 잘 자라준 아이들 아주 칭찬해♡


4편은, 월요일 밤 7시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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