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도 꿈결》 가을방학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 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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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돌아온 건
2022년 4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거의 두 달 만이었다.
깨어나 보니 대통령이 바뀌어 있었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일어났다고
와이프가 말해줬다.
진짜 기분이 이상했다.
장난하는 줄 알았다.
쓰러진 날은 2022년 2월 19일 오후 12시 반쯤.
뇌출혈이 있었던 날이다.
응급실에서 기절한 뒤의 일이다.
뇌출혈 시술을 하실 줄 아는 의사 선생님이
운 좋게도 그날 주말임에도 당직으로
그 병원에 계셨고,
마침 예약도 없어서
천운처럼 그날 바로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소뇌, 3·4뇌실, 중뇌, 뇌교, 연수, 시상까지.
광범위하게 온
두 번의 큰 출혈이었다.
거기에 지주막하출혈까지.
정말 어려운 시술이었고
상태도 굉장히 안 좋았다고 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2021년 말,
BIG5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한 분이
유명을 달리한 사건이 있었다.
그 뉴스를 보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
그렇게 큰 병원에 계셨는데도
시술을 못 받아서 그렇게 되셨는데,
지방 병원에서
출혈이 이렇게 컸던 내가
이런 시술을 받았다는 게
천운이라고 했다.
10% 확률 안에 든 거라고.
그동안 여러 사람을 치료한 보람이 있네.
그분들이 도와주셨나 보다.
이렇게 큰 시술을
이렇게 이른 나이에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인생에
뇌출혈이 올 줄이야.
지금도 매일매일이
꿈꾸는 것 같다.
항상 책으로만 보던 걸
내가 겪고, 누워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못 걷는 것도 그렇지만
처음엔 누워 있는 상태에서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는
그 느낌이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중환자실과 8인실에서
두 달 이나 가만히 누워 있었으니
코어가 다 망가졌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의 한 달은
아예 기억이 없다.
일반실로 옮기고 나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냄새와 소리였다.
1층 카페에서 올라오던
커피 향과 커피콩 빵 냄새.
그리고 옆자리에서
아침 일찍 지인들과
시끄럽게 통화하던
어떤 아저씨의 목소리.
광주 병원에 가서
연하 검사를 통과하자마자 먹었던
커피콩 빵이
어찌나 맛있던지.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느끼는 게
냄새와 소리라더니,
그걸 직접 경험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대만 여행을 간 줄 알았던 것 같다.
와이프 속도 모르고
그렇게 두 달을 가만히 누워 있었던 거다.
그땐 내가
일하고 있는 줄 알았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처럼
섬망이 있었나 보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와이프는
내가 눈뜨길 간절히 바라며
잠도 그 좁은 공간에서
8인실에서 한 달을 자며
버텼다.
사실 거의 못 잤다.
걸어가다 쓰러졌다고 했다.
어떤 간호사분이
10년 넘게 일했지만
간병하다 쓰러진 보호자를
딱 두 번 봤는데,
젊은 보호자가 쓰러진 건
처음이라고 했다.
발도 퉁퉁 부어가며.
으이그, 짠한 것.
결혼할 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주부습진 걸릴 판이다.
미안해, 여보. 진짜.
내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가
사진 찍으러 복도로 잠깐 나왔을 때,
우리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잘 있으니까 걱정 마” 하고
와이프와 엄마가
내 귀에 대고 말해줬다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자마자
내가 갑자기
숨을 엄청 거칠게
몰아쉬었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득한 꿈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던 것 같다.
그때는 코로나 때문에
중환자실 면회가 불가능했다.
반가워서 그랬는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쉰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를 두 달이나 못 보니
이상해했단다.
그 사이 전학도 무사히 하고.
기특한 녀석들.
익산 원광대병원에서
광주 슬기로운 재활병원으로 전원하던
따뜻했던 4월의 어느 봄날,
침대에 누운 채 병실 밖으로 나가는데
간병인 이모들이
내게 해준 말이 기억난다.
“젊으니까 언능 회복해서
둘이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어!”
그렇게 말년 병장 전역하듯
그 병실을 나왔다.
그게 4월 중순쯤이었을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대신경이 돌아오지 않아
쉰 소리만 나왔고,
혀는 절반이 마비돼서
(지금도 마비돼 있지만)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와이프에게 처음 했던 말.
“주식은…?”
그리고
오랜만에 둘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잠깐이었지만 신나게 웃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더라.
우리 와이프도
몇 달 만에
소리 내서 웃은 거였다.
근데 나는
진지한 거였는데.
조금 있다가
와이프가
시퍼렇게 물든
주식창을
조용히 보여줬다.
‘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