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녀. 내 마음에 들어오다.
32화. 그녀. 내 마음에 들어오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부대로 복귀를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휴가 이후로 일과가 끝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생겼다.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나중에 그녀와 통화를 하며 알게 되었는데 입시는 올해도 실패를 했고 내가 휴가 나간 기간에 동생과 함께 괌 여행을 갔었다고 했다. 그녀의 동생이 언니를 위로하기 위한 일이었다.핸드폰을 꺼놓은 까닭도 이유도 알 수 없어 답답했는데 그제 서야 의문이 풀렸다.
나는 군생활을 하면서 일과 시간외에 자투리 시간이 나면 나는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건축 대학원을 졸업하고 입대한 호철이 형 때문인데 이 형의 수많은 질문들이 나의 무지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미술 역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나에게 끊임없는 던지는 질문과 전문가적 소외를 물어보는 탓에 나는 그 무렵, 나의 무지에 자괴감이 들곤 했었다. 미술사도 모르는데 미학을 알 턱이 없지 않은가?
호철이 형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상가들이 매번 내 발목을 잡았다.
‘ 그래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유 병장님. 장 보드리야르라는 사상가를 아십니까?”
“ 나야 모르지. 누군데?”
“ 유 병장님은 시각 미술을 하시니까 반드시 알아야 할 프랑스 철학자입니다.”
형이 또 시작이구나 싶었다. 언제나 화두를 먼저 던져주는데 처음 듣는 사람들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싶었다.
“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시뮬라크르라는 겁니다.”
“ 시뮬레이션. 뭐. 그런 건가?”
“ 맞습니다. 불어 식 표현이라서 발음이 그런 겁니다.”
“ 한 번 읽어 보긴 해야겠네.”
“ 꼭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무언가 사고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 같았다. 이런 식으로 형은 자신의 논문을 쓰면서 보고 배웠던 사상가들을 나에게 많이 알려준 편이었는데 나를 끊임없이 공부하게 만들었다.
우리 내무 실 사람들은 대체로 학력이 좋다. 내놓으라 하는 대학에 공부 좀 해야 들어갈 수 있는 학과생들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개인 정비 시간이 되면 누구랄 것 없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가 때 나가서 토익을 보고 오는 녀석도 있었으니 같이 군 생활을 했지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나 또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 덕에 약간의 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군 생활 마지막 유격 훈련을 조교가 아닌 훈련병으로 마치고 복귀 한 뒤, 고생한 부대원들을 위해 대대장님은 체육대회와 대대 회식을 시켜 주셨다. 오랜만에 술과 고기도 먹고 나는 배구대회에 출전해 본부 포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큰 키로 블로킹을 많이 할 수 있던 탓에 점수를 많이 얻었다. 그 덕에 나는 휴가증을 또 챙길 수 있었다. 이즈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휴가를 나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유인 즉슨 주현이 누나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게 일던 그녀를 향한 마음은 이미 쓰나미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다행히 이 즈음 통화도 된 상태였다. 휴가 복귀 전 날 보기로 약속을 미리 했었다.
막상 휴가를 나와 보니 이제는 나와 놀아줄 사람이 없었다. 주현이 누나도 조금 일찍 만나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이 있는지 시간을 잘 내어주질 않았다. 세종이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그런가? 일이 잡혔다는 핑계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종이가 하는 일이 한 번 나가면 밤을 새우기가 일쑤고 스케줄이 꼬이면 뒤지게 고생한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예전처럼 녀석을 불러 낼 수가 없었다. 조금 외롭고 재미없는 휴가 중이지만 내일이면 주현이 누나를 만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를 위로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어제는 안양 지하상가로 오랜만에 옷을 사러 갔었다. 칙칙한 옷들로 가득했던 옷장의 옷 중에 내일 입을 옷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깔끔해 보이고 싶었던 까닭이다. 근데 후밴지 누군지를 데리로 나온다고 했는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안양 일 번가 근처에 있는 대동 서림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얼마 전부턴가가 서점 위층에 카페가 생겨서 여러모로 만나기 좋은 장소가 됐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호철이 형이 말했던 장 보드리야르 책을 찾아야겠다.’
나는 철학책들 사이에서 찾고자 했던 책을 고르고 있었다. 미술서적에서 인문학 쪽으로 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닌가? 주현이 누나였다.
“ 어? 일찍 나왔네?”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 주민아.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 먼저 나와서 살 책도 있고 해서 구경하고 있었지?”
“ 그랬구나. 나도 읽을 책이 있어서 찾고 있었거든. 무슨 책 찾아?”
“ 시뮬라시옹이라고 미학 책이야.”
“ 그렇구나. 나는 노마디즘이라는 책을 찾고 있었어.”
호철이 형이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노마디즘이라는 책인 질 들뢰즈라는 사상가가 쓴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이진경이라는 우리나라 학자가 번역한 책으로 미학을 수학 하는 학도들에게 필독서가 될 거라고 형이 말한 것이 기억이 났다.
“ 아. 그 이진경 씨가 번역한 책.”
“ 어? 주민이도 아네.”
“ 어. 알지.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유명하시잖아. 군대 있으면서 봤지.”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호철이 형의 질문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내가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 주민이도 인문학적 소양이 깊구나.”
누나가 웃으며 나를 본다.
“ 언니. 나 왔어.”
모자를 푹 눌러쓴 누가 봐도 덩치가 커 보이는 여자가 누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 여기. 주민이. 둘이 오랜만이지?”
아무리 봐도 초면인 거 같은데 어디서 봤다는 거지?
“ 잘 모르겠네. 어디서 봤었는지?”
진심으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 그게 오래돼서 그렇기도 하고 외모도 많이 변했지.”
우리는 윗 층에 자리한 카페테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와 차를 주문하고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누나가 입을 뗐다.
“ 나는 너희 둘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소개를 시켜주고 싶었어.”
누나가 입을 떼는데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예전에 화실에 내가 처음 갔을 때 같이 왔던 이경이잖아. 못 알아보겠어?”
솔직히 기억은 났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았다. 소개라니 무슨 말인가?
“ 나는 소개팅 같은 거에 관심 없어. 오로지 누나를 만나기 위해서 나온 거야.”
그리고 그 이경이라는 친구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는 하지만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라.’
라고 눈빛으로 나의 생각을 보내 주었다. 다행히 이경이는 눈치가 없는 친구는 아니었다. 한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들어가 볼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떴다.
“ 점심 식사나 같이 하면서 이야기나 좀 나눌까? 급한 일 있다는데. 나중에 연락하겠지.”
“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주현이 누나는 계속 이경이가 왜 갔는지 의아한 눈치였다.
‘이경이는 나의 눈빛에서 나오는 시그널을 보고 들어 간 거야.’
“ 다른 데 가지 말고 명관이네 갈까?”
그 사이 시간이 좀 지나서 왠지 문을 열었을 것 같았다.
낮이라 한산한 안양 일 번가 길을 따라 걷는데 익숙한 듯 낯설었다. 뭐가 있을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가는 사람 마냥 길을 찾아 가보니 친구의 가게는 문이 열려 있었다.
명관이는 학교에 간다고 없었고 어머니만 술집을 지키고 계셨다.
“ 어. 주현이 왔구나. 반갑다. 잘 지내지?”
명관이 어머님께서 인사를 반갑게 건네신다. 인테리어 할 때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하더니 그렇긴 한가 보다.
“ 안녕하세요. 명관이 어머님. 저는 대학교 동기 유주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도 인사를 건넸다.
“ 어서 와요. 친구들이라고 와 줬구나. 고마워요.”
“ 어머니. 저희는 지금 식전입니다. 술과 함께 먹을 안주 추천 좀 해 주세요.”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 식전이면 밥 먹어야지. 밥이랑 먹으려면 국내지 탕이 낫겠네.”
어머님은 모시조개가 좋다며 조개탕을 내어 주셨다. 물론, 공기 밥도 함께. 개운하고 깔끔한 맛이 소주와 함께 먹기에 좋았다. 맨날 치킨 같은 것만 시켜 먹다가 시원한 국물과 함께 먹으니 술이 달았다. 앞에 앉아있는 주현이 누나와의 조우도 얼마만인가?
“ 그래서 다음 주부터 다시 미술관에 출근을 한다는 거네?”
“ 시험 끝나고 미술관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어. 결과가 어떻게 됐냐고. 그래서 떨어졌다고 했더니 출근 다시 해줄 수 있냐고 하더라고.”
“ 그전에 얼마나 일을 잘해줬으면 담당자가 그랬겠어. 한국예술 종합학교도 정말 괜찮은 학생 놓치는 거지. 뭐.”
“ 군인도 책 읽을 시간이 있나 봐?”
“ 어. 나 같은 경우는 상황근무라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해야 하는 직책이라 그럴 때도 보고 일과 시간 끝나고 저녁 먹고 나면 2시간 반 정도 시간이 남거든. 그때 개인 정비 끝내 놓고 읽는 거지.”
호철이 형하고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누나와 소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누나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면서 큐레이터들이 써놓은 전시기획서를 보면서 미학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사상가의 정확한 이론을 알지 못하면 문맥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하나씩 찾아보다 보니 너무 방대해졌다고 하는데 지식의 홍수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나와 비슷해 보였다.
“ 그래서 나도 [서양 철학사]라고 거의 모든 사상가들의 저서와 철학을 정리해 놓은 요하네스 힐쉬베르거라는 사람이 쓴 책을 봤었거든. 누나도 시간 되면 한 번 봐봐.”
“ 그 책 나도 알아. 비싸서 아직 못 사고 있었는데. 나중에 읽어 봐야겠다.”
“ 그리고 미술사도 관심 있으면 [미술사의 기초개념]이라고 하인리히 뵐플린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면 20세기 이전 미술은 다 정리가 될 거야.”
호철이 형과 시간 날 때마다 나눴던 대화에서 배운 배경지식과 책들이 오늘 누나와의 대화에서 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는데 길어지는 만큼 술도 많이 마시고 있었다.
나는 군 생활을 하면서 잘 짜인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군대의 오기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건강해져 있었다. 나는 하루에 평균 500개 정도의 푸시업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어서 근육은 단단했고 신체 대부분의 밸런스는 좋았다.
“ 군대에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게 대단해.”
“ 일과 시간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군인들 시간 많아.”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정봉이 형이었다.
“ 주민아. 어디야?”
“ 어. 나 안양시내에서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 그래? 정화누나가 불러서 정왕역 가려고 하는데 오랜만에 같이 보면 좋을 거 같아서.”
정화누나는 정봉이 형의 결혼을 한 친누나이다.
“ 누나 친척 형이 전화가 왔는데 정왕동에 친척 누나 일행이랑 같이 합석하자는데 같이 갈래?”
“ 초면인데 불편하지 않을까?”
“ 정화누나도 철학과 나왔고 매형도 문예부 출신이라 아마 말이 잘 통할 거야.”
“ 같이 가도 될까? 불편한 거 아냐?”
“ 같이 일하는 간호사들이라고 했으니까 너무 연연하지 않아도 돼.”
“ 그래? 그럼 같이 가자.”
“ 직장동료들이랑 회식 자린데. 나 휴가 나왔다고 하니까 불렀나 봐.”
“ 여기서 그만 먹고 일어나야겠다.”
먹던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3시 남짓부터 마신 거 같은데 벌써 시간이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 어머님. 잘 먹고 갑니다. 안주 맛이 좋습니다.”
“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요. 조금 있으면 명관이 올 텐데 보고 가지?”
“ 그러고 싶은데 갑자기 약속이 잡혀서요. 다음에 또 올게요.”
“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지.”
“ 어머니. 잘 먹고 가요. 또 올게요.”
주현이 누나도 인사를 건넨다.
정왕역을 가려면 전철을 타고 가야 했고 형은 금정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전철을 타기 위해 안양역으로 향했다. 그녀와 같이 걸으니 발걸음도 가볍고 술도 취하지 않는 것 같았다.
“ 오늘 술 많이 마신 거 같은데 괜찮아?”
“ 좋은 사람이랑 마셔서 그런가 안 취하네.”
“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많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긴장한 탓도 있을 것이고 대화 내용이 흥미로워서인지 좀처럼 취기가 오르지는 않았다.
친척 누나의 동료 간호사를 형한테 소개해줄 요량인가 보다. 정화누나는 피부과 병원에서 코디로 일하고 있었다. 철학과를 나온 누나는 대학원에서 피부미용을 전공해서 현재의 일을 하고 있었다.
금정역에서 형을 만나 안산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정왕역은 생각보다 멀었는데 주현이 누나를 형도 처음 보는 사이다 보니 적당히 어색했다.
술집은 정왕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 정화누나가 일하는 곳이 이곳이구나.’
누나는 지금의 남편을 불교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할 때 만났다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충남대학교 동문이었다. 동료로 만난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을 할 무렵에는 불교신문사를 나와 다른 직업을 갖게 됐다. 정화누나 남편은 대전에서 판촉 일을 하다가 뒤늦게 건축기사 자격증을 따서 건축현장에서 소장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 결혼을 해서 대전에서 살다가 안산으로 이사 온 지 2년 남짓 됐는데 직업도 그때 다 바꾼 것이었다. 군대 있던 나로서는 소식 정도나 들었지 직접 만나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그들의 결혼식조차도 군인 신분이라 참석할 수 없었다.
술집에 들어서니 가게 중앙에 큰 테이블을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 와.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 어서 와. 주민아. 몇 년 만에 보는 거 같아. 진짜 오랜만이다.”
“ 주민이. 군 생활 힘든가 보다 살이 많이 빠졌네.”
“ 군 생활은 생각보다 재밌어요. 동료들을 잘 만나서 재밌게 하고 있어요.”
“ 참 소개가 늦었네요. 여기는 그림 그리는 동료 강주현이고 여기는 나의 외종사촌 누나랑 그 남편이야.”
어색한 소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참 예쁘게 생겼네요. 반가워요.”
“ 안녕하세요. 강주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다들 앉아요. 온다고 해서 넓은 대로 자리 잡고 있었어.”
정작 소개를 주고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소개를 하고 있었다.
“ 정봉이도 인사해. 여기는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영란 씨. 소영 씨.”
정화 누나가 소개를 이어 갔다.
“ 네. 안녕하세요. 정화누나 남동생 이정봉입니다.”
형이 인사를 했다. 합석을 하고 있던 정화누나 동료들도 쑥스러운 인사를 이어 나갔다. 나와 주현이 누나도 술을 한 잔 하고 왔고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며 있던 사람들도 술을 한 잔 한터라 긴장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는데 형은 조금 긴장을 한 모습으로 보였다. 평소보다 경직되어 보였다.
“ 자. 자. 다들 왔으니까 잔들 채우고 건배를 합시다.”
빠르게 잔을 채우고 건배를 했다.
“ 반갑습니다. 건배!”
자리를 만든 정화누나가 외쳤다.
“ 건배.”
“ 건배.”
수줍게 웃는 모습의 주현이 누나를 본다. 여기까지 같이 온 것이 마냥 신기했다. 우리의 인연은 어디로 흘러갈까? 부대에서 누나를 그리워하며 많은 생각에 빠지곤 했었다.
다시 사회로 돌아오면 나는 당연히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림을 팔아 본적도 파는 사람도 거의 보지도 못한 터라 그림을 그려 파는 행위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거의 안 해봤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지 아님 다른 직업을 갖고 그림 작업을 병행해야만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현실을 마주하진 않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며 생존하는 것이 나름의 가장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그런 삶을 함께 할 만한 이성이 있을까? 단번에 생각난 사람이 주현이 누나였다. 어찌 보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내 마음에 들어온 순간이.
술을 많이 마셔 정신이 혼미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술집 앞 계단에서 주현이 누나와 입을 맞추고 있다.
‘ 이건 꿈인가?’
달콤한 시간이 지나고 꿈인가 싶었는데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은 터질 듯 뛰는 내 심장박동 소리 때문이었다.
“ 잠깐. 시간이 얼마나 됐지?”
정신이 번뜩 들었다.
“ 11시 정도 됐어.”
누나의 말을 들어보니 화장실을 갔다 온다는 내가 돌아오지 않아 나와 보니 계단에서 졸고 있었단다. 옆에 앉아 깨우니 갑자기 내가 입을 맞췄다는 말을 들었다. 취중진담이라 했던가? 무의식 중의 나는 나의 진심을 전하려 했던가? 나도 인지하지 못한 내가 그녀에게 나를 던져버린 것이었다.
“ 가야 되겠어. 이러다 전철 놓치겠다.”
나는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 그래.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일어나자.”
우리는 테이블로 돌아가서 인사를 하고 급하게 나왔다. 9월인데도 밤이 되니 공기가 찼다. 전철역까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도착했다.
근데. 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차를 보내 버리고 그녀와 밤새 같이 있고 싶어졌다. 그래야만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아까 나누었던 입맞춤이 설명될 수 있을 거 같았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도 나를 원하고 있었다. 다시 격렬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는데 그 달콤하고 짜릿한 기분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 그럴 거면 그냥 여관을 가소.”
역 앞에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 기사님을 혀를 찾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아. 네? 네.”
생각해보니 길에서 이런 애정 행각을 벌인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시간도 늦어서 집에 돌아가기도 애매하게 먼 곳에 왔다. 어쩌면 이런 일은 예견된 일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 갈까? 여관.”
“ 그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와 같이 밤을 지새울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그 꿈같은 시간이 왔구나. 여관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자주 못 만난 시간을 서로에게 위로해 주듯 뜨거운 밤을 보냈다. 드디어 우리는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그녀는 내가 되었고 나는 그녀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어갔다.
다음날이 되었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오늘이 부대로 복귀하는 날이라 엄마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가까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에 몸을 실었다. 전철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저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그녀는 평촌에 살기 때문에 우리가 타고 온 전철을 계속 타고 가면 된다.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나는 금정역에 당도해서 인사를 나누며 내렸다.
“ 전화할게. 우리 다시 만나자.”
“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짧은 인사를 나누며 그녀를 남기고 내렸다. 문이 닫히고 천천히 전철이 출발을 하는데 그녀 뒤로 햇살이 드리우며 비추는데 마치 성인에게서나 볼 수 있다는 후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은은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마저 눈이 부셨다.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 들어와 나만의 여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