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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엄버 Sep 08. 2022

36화. 작업실.

36화. 작업실.

36화. 작업실.


 한참 한파가 기승일 때 작업실을 얻어 작업실 내부는 시베리아였다. 작업실에서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자기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하 1도에서 그냥 잠을 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혹한기를 대비하는 마음으로 방한을 대비할 수 있는 물건들이 필요했다. 일단, 처음 산 것은 전기밥솥이었다. 간단하게 취사를 해야 하는 것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필요했던 것은 침대와 전기장판, 이부자리, 간단한 음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가재도구였다. 한 겨울이었지만 오리털 파카를 입고 전기장판을 켜고 누워있다 보면 이불 안은 조금씩 따뜻해지다가 잠을 잘 수 있을 정도까지 따뜻해졌다.

 작업실을 차리고 한 보름 정도는 주현이는 집으로 귀가를 했다. 그러다가 굉장히 추워진 날에 혼자만 집에 갈 수 없다며 내 옆에서 자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계속 만류했지만 그녀는 한 번 결정한 마음은 쉽게 바꾸지 않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내 소중한 정인 그리고 나의 뮤즈는 나에게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소꿉장난 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을 마치고 작업실에 도착하면 나는 주현이를 기다린다. 밥도 해놓고 간단한 밑반찬을 만들기도 하며 기다리다 보면 주현이가 작업실로 퇴근을 한다. 아침 식사를 거르다 보니 같이 먹는 시간은 저녁시간이 전부였다. 그래서 뭐를 먹어도 맛있게 먹고 싶었다. 없는 살림에 크진 않지만 중고로 냉장고도 장만했고 식기 건조대며 작은 식탁이며 점점 없는 것이 없는 곳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친구들과의 소통은 많이 줄어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군대 제대하고 자리를 잡으려고 애쓰고 있던 것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충재는 수원에 있는 미술학원에서 강사 일을 시작했고 세종이는 조명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자취방을 얻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철이 녀석은 말할 것도 없이 스타강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작업실을 얻은 지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갑자기 준비 없이 사회로 던져진 나도 열심히 일하는 팀원들과 1년이 넘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니던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더 이상 휴학을 하게 되면 제적이 된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3번의 휴학으로 횟수가 제한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미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 사실을 주현이에게 털어놨다.

 “ 학교에서 연락이 왔는데 더 이상 휴학이 안 된다네. 어쩌지?”

 “ 주민아. 너도 이제 학교로 돌아가서 미뤄뒀던 학업을 마쳐야 하지 않을까?”

 “ 그림이야. 이렇게 돈 벌면서 하면 되지 뭐. 굳이 졸업장이 필요할까?”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학업을 이어나가는 것은 너무 무리였다.

 “ 무슨 소리야? 주민아. 어떻게 들어간 학굔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니?”

 “ 지금도 돈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는데 일을 안 하면서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겠어.”

 “ 아니야. 주민아. 너라면 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믿어.”

 자신이 없던 나에게 그녀의 응원은 큰 위로가 되었다. 일단 부모님과도 상의를 해봐야겠다 싶었다. 집의 상황은 계만 끝났지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상황은 어려웠지만 나와 우리 가족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일을 하시던 엄마는 점 점 활력을 찾아 나가셨다. 오랜 시간 채권자들로부터 추심을 받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개인 파산 과정에서 극심했던 추심도 사라졌다. 하지만 개인에게 빌린 돈은 양심상 꼭 갚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내가 학교를 다시 다니기를 희망하셨다. 본인 때문에 내 인생이 꼬이는 일이 없기를 바라셨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의 복학은 결정되었다.

 지난해 엄마는 급전이 필요하셨는지 내 이름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으신 적이 있었다. 내 명의다 보니 추심도 나에게 직접 전화가 왔었는데 대기업에서 하는 캐피털 금융이었다. 캐피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악질일 수가 없었다. 나는 복학을 진행하기 전 그동안 모은 돈으로 나머지를 한 번에 갚아 버렸다. 그러고도 한 학기 정도 쓸 정도의 돈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등록금은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셨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애써주신 아버지에게 나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결혼을 한 큰 누나에게는 작년에 큰일이 있었다. 어렵게 낳은 딸이 심장 기형으로 태어나 위태로운 수술을 해야 했는데 수술 중에 그만 하늘나라로 가버린 것이었다. 모든 가족들은 오열했다. 어려운 중에 찾아온 녀석이었고 그 녀석을 통해 우리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녀석이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참아왔던 눈물이 났다. 살면서 그렇게 소리 내서 울어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힘들었던 순간들을 울지 못했던 울분이 터져 나 온 듯이 나는 오열했었다. 그리고 갑자기 매형이 부산으로 발령이 나면서 전세계약을 했던 집으로 부모님이 이사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사를 한지 몇 달이 되지 않은 집이라 애매한 상황이었는데 부모님이 세 들어 살던  집주인은 부모님의 편의를 잘 봐주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옥탑생활은 끝이 났다. 큰 누나네 집은 방이 세 개였다. 이사를 하고 나서 부모님은 내가 집으로 들어오기를 희망했지만 나는 작업실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갔다.

 우리 작업실도 이사가 필요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지불하기에 임대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주현이와 의논 끝에 이사를 결정했다.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낮은 수준의 임대료를 내서 쓸 수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500만 원에 12만 원짜리 반 지하를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 집하고도 가까워서 좋았고 학교와도 전철로 두 정거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통학에도 이점이 있었다.

 고맙게도 주현이네 집에서 300만 원을 보태주시기로 하셨다. 밖에 나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써주신 것인데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이사 날짜를 받고 학교도 복학해서 다니는데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 학기 생활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학기는 이론 수업과 교양 수업을 위주로 수강신청을 했다. 아무래도 서양화 작업을 하면 돈이 더 많이 들어가니까 가벼운 드로잉 수업만 수강신청을 했다.


 2학년 2학기에 복학을 해보니 얼굴도 모르는 후배 녀석들이 벌써 군대를 갔다 와서 같은 학년이었다. 약간 새로운 국면이었지만 씩씩한 녀석들이 많아서 좋았다. 아마도 나와 졸업 동기들이 될 녀석 들일 것이다. 삼수를 한 친구들이 둘이나 있었는데 나와 동갑이었다. 녀석 둘은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서 한 동안 학교에서 많이 보지는 못했다.

 작년에 같은 수업을 들었던 녀석들은 어느덧 3학년이 되어 제법 큰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대체로 3학년 정도 되면 학교에서도 공모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면서 큰 그림들을 그리게 되는데 큰 그림을 그리면서 앞으로 다가올 졸업전시를 천천히 준비하게 된다. 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100호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중요하다. 작은 그림만 계속 그리게 되면 큰 그림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면 조금씩이라도 사이즈를 키워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모전을 해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 된다.


 신 학기가 되면 조교 실에서 4명씩 조를 짜서 재료를 나눠준다. 면천 한 롤과 테레핀 4리터짜리 한 통, 붓 빨리 기름 한 통씩 주는데 이 정도면 대충 한 학기를 쓰기에 적당하다. 왁구는 따로 준비하는데 과대표가 계속 거래를 해왔던 화방에서 도매가로 물건을 한꺼번에 구매를 해서 나눠준다. 서앙화과를 다니려면 등록금 이외로도 나름 돈이 많이 들어간다.

 나는 작업의 이원화를 막기 위해 2학기까지는 유화를 다루는 수업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맹점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리포트를 잘 쓰고 발표를 잘해도 타과에서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해서인지 미술평론과 수업에서 점수를 잘 주지 않았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장학금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전시기획, 미학, 근. 현대 미술사, 예술사회학 등등의 수업을 듣다 보니 책도 책이지만 현재 진행 중인 전시를 보러 다닐 일들이 많았다. 주로 전시는 성범이 형과 주현이가 시간이 되면 같이 가서 관람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에 좋은 전시들이 많아 발품을 꾀나 팔아야 했다. 전시를 같이 보면 좋은 것이 각자의 비평을 서로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작품 감상문과 전시기획서 같은 것들을 쓰는 일에도 적잖게 도움이 된다. 앞으로 거대한 미술 시장이 열릴 것 같은 분위기 또한 작품 관람과 내 작품의 방향성을 설정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슬슬 작품을 하고 싶은 발동이 걸리고 있었다.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까운 그림을 한 번 그려보고 싶었다. 아직 변변한 카메라도 조명장비도 기술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미술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나름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의 출시와 저변화가 미술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무궁무진할 것으로 보였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디지털 이미지를 왜곡하고 재 해석을 하는 작품부터 집요한 묘사력으로 그전에 있었던 미술작품과는 확실히 달라진 느낌의 작품들까지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가 cg기술이 좋아지면서 완전히 스펙터클이 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도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 중에 사진을 찍다가 흔들린 사진들을 그려보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카메라의 화소가 다소 떨어져 그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고 효과도 미미했다.

 전문가가 찍은 수준의 사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잡지와 화보집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성 잡지를 많이 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명품들을 접하게 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미용실에서 잡지를 보며 자란 나에게 잡지는 미술책과 다르지 않았다. 잡지를 보며 이미지를 상상했고 잡지를 보며 색과 구도를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현이 동생은 무용을 전공한 학생이었는데 우연히 모델 대회에 나갔다 대상을 받으며 고등학교 때 연예계에 진출했다. 가수를 했다고도 했고 종종 예능이나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가장 많이 보이는 곳은 단연 광고였다.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절이 내가 군대 있을 때여서 나는 텔레비전에서 주현이의 동생을 본 적이 없었다.

 광고 모델 일을 많이 하는 동생을 보면서 광고 조명 일을 하는 세종이를 보면서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는 광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티브이 광고를 보다 보면 마치 광고 속 그 아파트에 살게 되면 여유 있는 삶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으며 마치 어떤 카드를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터무니없는 묘사로 소비자들을 현옥 시키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는 그렇게 가증스러워 보였다. 허위 과장 광고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광고의 허구성이 너무 쉽게 용인되어가는 모습에 경각심을 가지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우리 엄마도 신용카드를 잘 못써서 지금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라도 그 위험성을 알여줬다면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생각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디지털 기기들이 발전하고 상용화되면서 광고부터 다른 형태의 미디어, 게임 등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고 대비해야 하는지가 궁금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인터넷상에서 필요 이상으로 양산되는 정보들은 쓰레기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 중에서 나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들렸던 말은 티브이에서 접하는 디즈니랜드를 내가 직접 가보지 않는 이상 그것은 그저 가상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해했을 때는 허상을 쫒지 말고 내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실재하는 것을 아끼고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화면으로 보이는 것들은 모두 허상일 뿐이라는 것.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실재하는 것들과 더 조우해야 된다고 학자는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작품을 통해 전달하리라. 실재하는 것들을 사랑하라고. 환영은 그저 환영일 뿐이라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작품의 주제들은 이렇게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번 학기는 이론수업을 집중적으로 듣는 바람에 사고의 저변을 넓히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3학년 때 졸업 작품을 다 해놓고 4학년은 편하게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하지만 당장 고민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정도 학교를 더 다녀야 했는데 돈이 바닥이 난 것이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방학인데 돈이 다 떨어진 것이었다.

 주현이는 버는 돈을 다 집에 갔다 드린다. 주현이는 아버지가 직장을 잃으시고 난 뒤 주현이는 줄곧 가장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 살림은 내가 스스로 해결해오고 있었다.

 나는 군대를 제대하면서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 자존심은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부모님께 손을 벌리게 하지 못했다. 차비조차 없어서 쩔쩔매고 있던 그때 기적적으로 성우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 형. 알바 안 하실래요?”

 “ 무슨 알바?”

 “ 별거는 아니고 열린 음악회 아시죠? TV 프로”  

 “ 알지. KBS 1에서 하는 가요 프로.”

 “ 맞아요. 거기서 진행 요원하는 건데. 그냥 사람들 통제하고 가만히 서있으면 되는 알바예요.”

 성우는 우연히 이벤트 회사에서 알바를 하게 됐는데 이사님이 성우를 잘 봐서 계속 일을 맡기고 있다고 했다. 성우는 원래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음악을 한다고 두문 분출하고 있었는데 꽤 오랜만에 전화가 온 것이었다. 나에게 지금 상황에선 꿀 같은 알바였다.

 막상 일을 나가보니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길에서 사람들한테 길 안내해주고 통제해야 하는 길을 통제하면 되는 일이었다.

 막상 공연이 들어갔을 때는 할 일이 없어서 나도 운동장으로 들어가서 일부 시간은 무대를 감상하기도 했다.

 방송 쪽 일이 왜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지 알 수 있는 경험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스텝들이 티브이에 방영하는 한 시간 동안의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시청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애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며칠 더 이 업체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다음번 일은 디자인 공모전 도우미 알바였다. 공모전을 내기만 했었지 실제로 참여를 해서 작품을 걸고 전시를 준비하는 기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전시장에서 그림을 걸어본 경험이 있어서 일이 어렵지 않았다. 이 알바 덕에 누구한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무사히 학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방학이 되자마자 설비 팀장님 한테 전화를 걸어 혹시 일을 할 수 있을지 물었다. 운 좋게도 팀장님은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 계셨다.

 현장은 무지하게 컸다. 팀장님이 맡은 일도 전체 설비 중에 일부였는데도 데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20명 정도 됐다. 공사 현장이 아파트다 보니 세대마다 할 일들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나온 나는 그저 조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현장에 일들이 산적해 있어 심야에까지 작업을 하는 일들이 일쑤였는데 이점은 나에게 굉장히 이로운 점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면 이틀 치의 급여가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꼬박 두 달을 일했는데 석 달을 일한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잠이 부족해서 힘은 좀 들기는 했지만 다음 학기는 지난 학기보다 조금 더 넉넉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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