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아트페어.
53화. 아트페어.
영길이가 다시 들어오면서 물류는 르네상스 시기를 맞게 됐다. 한 동안 웹툰 작업에 골몰했던 영길이는 만화보다는 회화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영길이는 인터넷 블로그에 자신이 그린 짧은 웹툰을 연재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별로 없었다.
주현이와 나는 골든아이 아트페어에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서 전시 기간 내내 코엑스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주현이는 작업실에서 바로 삼성동으로 넘어갔고 나는 안양에서 물류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를 타고 삼성동으로 향했다. 우리는 이번에 하는 부스 개인전이 처음 해 보는 아트 페어 전시였다.
부스는 추첨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런데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거의 맨 끝 쪽이었지만 뭐 그래도 크게 불만스럽진 않았다. 어차피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은 끝까지 다 보고 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울 때 코엑스에서 부스를 하나 빌려서 전시를 하려면 대략 500만 원 정도 비용이 든다고 배웠는데 둘이서 무료로 하는 전시인데 뭐 불만을 가질 필요가 있나 싶었다.
코엑스에 도착을 하면 ‘ARTIST’라고 쓰인 목걸이 인식표를 걸고 안으로 들어간다. 가운데로 쭉 가다가 보면 주현이의 부스가 보인다. 오늘도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주현이는 미술관에서 일한 경력이 길어서 전시장에 있는 모습이 늘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인다. 그녀가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일을 할 때나 덕수궁 미술관에서 일을 할 때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 참. 많은 시간 애쓰면서 왔는데 결국 이런 곳에서 같이 전시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주현아.’
“ 나 왔어. 책 보고 있었네?”
“ 일찍 왔네. 심심해서 뭐라도 하고 있으려고.”
“ 어 부스 지켜야 한다니까 인수도 자기들이 돌아 준다고 일주일 동안 그렇게 해준대.”
“ 동료들 맞네. 편의도 봐주고. 커피 한 잔 하고 올까?”
“ 그래. 자판기 들어올 때 보니까 앞에 있던데.”
요즘 사람들은 전문점 커피라고 비싼 원두커피를 마셨지만 우리는 예전부터 즐겨 먹던 믹스커피가 좋았다. 그리고 주현이는 원두커피를 마시면 그날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꺼리는 편이었다. 카페인 함유량이 10배에 가깝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주현이 외할머니께서 협심증이 심하셔 가지고 심장 수술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심장이 약한 게 아마도 유전인 거 같았다.
전시장에서의 시간은 차분한 장내 분위기의 무게를 더해 더욱 더디게 흘러간다. 그렇다 보니 짬이 날 때마다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게 된다. 이곳에서 일주일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니 살짝 앞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이러한 휴식의 시간도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그림에 파묻혀 살겠지만 말이다.
전시장 입구에 있던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내어 흡연구역으로 왔다.
“ 관람객들은 좀 있었어?”
“ 나도 조금 전에 왔는데 주말이나 되어야 있지 않을까?”
“ 하긴 우리도 주말에나 시간 내서 오지 평일에는 쉽지 않은 걸음이지.”
“ 주민이 부스 들어가는 길에 멘 앞에 계신 작가 분 국전에서 최우수상 받으신 분이더라?”
“ 어. 나도 봤는데. 선생님한테 여쭈어 보니까 이미 유명하신 분이더라고. 그런 분도 이런 곳에 응모를 하는 거 보면 이 전시가 보통 큰 전시가 아닌 거 같아.”
“ 나름 들어오기 어려운 전시에 같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 내 거도 그렇고 주현이 너 것도 그렇고 이번에 그림이 한 번 팔려 봤으면 좋겠다. 벌써 판매 딱지 붙은 부스들도 여럿 보이던데.”
“ 벌써? 빠르네.”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마련된 경매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내 작품 하나가 그 경매에 들어가게 됐다. 경매를 어떤 형태로 진행을 하게 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 기대가 더해지고 있었다.
“ 배가 점점 고파지는데 식사는 어떻게 하지?”
“ 그러게. 일단 자하 상가 좀 뒤져보면 뭐가 좀 나오지 않을까?”
“ 한 시간 정도 부스 더 지키다가 밥 먹으러 가자.”
전시를 준비한 업체는 참여하는 작가들은 따로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표를 작가마다 20장씩 사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50장을 사라고 했던 것을 일부 작가들의 불만이 폭주하면서 그 양이 줄어서 그 정도에서 타협을 본 것이었다. 나 나름대로는 코엑스에서 부스 전시하는데 그 정도는 충분히 부담해 줄 수 있었다. 주현이 것 포함 40 매였음 에도 말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에게 표를 많이 뿌리게 됐다. 그런 핑계로 경륜장 사모님도 오랜만에 한 번 뵙기도 했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표를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역시 실패가 거의 없는 메뉴로는 단연 중국집 짜장면이다.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발견한 중국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아무래도 부스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는 관계로 빠르고 간단한 음식을 선택했다. 나름 맛도 괜찮았다. 코엑스에서의 첫째 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다른 작가 그림도 구경 갈까?”
“ 그래. 다들 점심시간이라 지금이 좋을 거 같아.”
“ 도록으로 대충은 봤지만 제대로 한 번 봐야지.”
우리는 마치 관람을 하러 온 관람객 같이 다른 작가들의 부스를 둘러봤다. 전시장 입구 앞쪽은 말 그대로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기성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가 되어있어 뭔가 모르게 권위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전시장 중간 정도 지나서부터 이번 공모에 선정된 작가들의 부스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큰 복도를 지나가는데 낮 익은 분을 만나게 됐는데 다름 아닌 학교 다닐 때 학과장님이셨던 임 교수님이었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주민아.”
“ 네. 아니. 교수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 어쩐 일이겠냐? 초대를 받았으니까 왔지.”
“ 아. 그러셨구나. 아무튼 너무 반갑습니다. 졸업한 이후에 한 번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 바쁘면 다들 못 찾아오지. 근데 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
“ 네. 저는 여기 선정작가가 돼서 부스 개인 전하고 있는 중이에요.”
“ 그래? 아니 그럼 전화라도 해서 알려줬어야지.”
“ 경황이 없어서 일본 개인전도 준비 중이라 요즘 너무 바빴거든요.”
“ 작품 하느라 정신이 없나 보구나. 네 부스로 좀 가보자.”
교수님은 주변에 다른 교수들에게 나를 자랑하며 우리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기는 도중에 선배가 한다는 화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셨다.
“ 네 선배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찾는 선배가 있는데 주민이 네가 그쪽으로 가서 일 좀 도와주면 어떨까 해서.”
졸업을 한지 일 년이 넘게 지났고 오늘 진짜 우연히 만났는데 뭔 말인가 싶었다.
“ 저 말고도 그림 잘 그리는 녀석들 많잖아요.”
“ 아니 정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찾아 달라고 했는데 내가 너를 만나려고 여기에 왔나 싶다. 주민아.”
사실 임 교수님을 따르는 학생들은 학교에 줄을 섰었다. 학부생, 대학원생 할 것 없이 임 교수님이 주시는 콩고물을 받아먹으려는 학생들이 많다는 뜻이다. 공모전에서 상을 받기도 해야 하고 졸업 후에 취업을 위해서라도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 교수님에게 잘 보이려고 줄 서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교수님 찾아뵙지도 않은 저에게 기회를 주시려고 하세요? 대학원생들 중에 그림 잘하는 친구 소개해 주세요. 저는 지금 작가에게 딱 맞는 일을 하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 연봉도 많이 챙겨준다고 했으니까 생각 좀 해봐.”
“ 교수님. 저 새벽에 서너 시간만 일해도 120만 원 정도 버는 일을 지금 하고 있어요. 작품 하는 저한테 딱 맞는 일입니다.”
“ 그래? 그렇게 적은 시간을 들이는데 돈을 그렇게 벌 수가 있다고?”
“ 네. 물류 같은 건데 길게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고요. 아무튼 그림 그리면서 시간 쓰기가 너무 좋아요.”
“ 주민이 너 말대로라면 괜찮은 일 같구나.”
임 교수님은 주현이의 부스까지 둘러보고 바쁜 일이 있다며 걸음을 재촉하시고 떠나셨다. 이런 곳에서 교수님을 만난 것도 신기한데 취직에 대한 제안을 받은 일이 더 신기했다. 학교 다닐 때 교수님 하고는 작품과 전시에 관련된 이야기 말고는 별 다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엘리트 코스로 교수가 되신 분이라 취직 같은 이야기를 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과장이 되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바뀌셨나 보다. 전시 첫째 날은 임 교수님을 만나는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