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트페어 일주일.
54화. 아트페어 일주일.
다음 날이 되었다. 물류를 마치고 코엑스로 향하는데 영길이가 따라나섰다. 전시를 보고 싶다고 해서 티켓을 주었더니 오늘 따라가서 작품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작품도 작품이지만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보고 싶다며 나와 동행했다. 영길이 녀석은 겨울에 있는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낸다고 열심히 작품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에도 나에게 조언을 구했었다.
“ 영길아. 학교 같은 거 자격지심 갖지 말고 네가 제일 잘하는 그림을 그리면 되는 거야.”
“ 제가 잘하는 그림이라고 하면 만화 같은 그림인데 그런 그림이 순수미술이 될 수 있을까요?”
“ 세상에 수많은 돌멩이가 모양이 다 다르듯이 미술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다양성이 많은 미술계가 더 건강한 것 아닐까?”
“ 그럼. 형이 인정해 주니까 일단, 시작은 해 볼 게요.”
“ 그래.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라.”
“ 네. 형. 고마워요.”
그날 이후로 녀석은 더 작품에 매진했다. 나중에 선생님 화실에 구경을 가보니 100호 한가득 만화에나 나올법한 집들을 작은 크기로 쌓아 웅크리고 있는 인물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녀석 다운 발상이었다. 녀석은 만화 작업을 할 때 배운 배경을 그리는 방법으로 즉 자신이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미국 현대 미술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만화 같은 그림들이 등장을 했고 미술관에 서식을 하고 있는 중이라 이미 순수미술의 개념으로 인정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아직이었다. 순수미술이라는 세계가 뭐 대단한 거 같지만 미술관에 전시를 한 것이냐? 아니냐? 정도로 개념으로 정리해도 무방하다. 사진 같은 경우에도 처음에는 순수예술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을 아니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 미술관의 문은 열리게 마련인 것이다.
은식이도 물류로 들어오면서 다시 선생님 화실에 다니고 있었는데 두 녀석 다 공모전 준비에 한창이었다. 바쁘게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 그래도 친한 형이 전시를 한다니까 따라나선 것이었다.
“ 형, 질문이 있는데요? 미술을 하려면 철학과 인문학을 꼭 알아야 하나요? 더군다나 서양철학은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요.”
“ 철학을 다 알 필요는 없지만 미학도 철학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좋지.”
“ 철학책 읽기는 읽는데 진도가 잘 나가질 않아요. 철학자들도 책에서 말하는 언어도 잘 이해가 안 가고요.”
“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차분하게 ‘철학과 굴뚝청소부’ 같은 책부터 읽어 봐.”
영길이는 강릉고등학교라는 강릉에서는 나름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학교도 강원대 토목과로 진학을 했는데 군대를 가기 전까지만 학교를 다녔고 지금까지도 휴학한 상태였다. 만화를 배우러 무작정 상경한 탓인데 선생님 화실까지 다녔던 것을 보면 이 녀석도 미대를 진학을 했어야 하는 녀석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강했다.
“ 영길아. 순수 회화를 하려면 그림은 누구한테든 배우지 않는 것이 너에게 제일 유리할 거야. 형이 너한테 물감이나 보조제. 그리고 재료에 대한 것에 대한 설명을 해 줄 수는 있지만 그림을 가르쳐 주진 않을 거야. 너 스스로 방법을 찾아봐. 알았지?”
“ 왜 그러면 안 되는 거 에요? 저는 형한테 그림 너무 배우고 싶은데.”
“ 네가 나한테 배우면 유화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넌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 아류밖에 되지 않는 거야. 그래서 애초부터 배우면 안 돼. 취미로 그림을 그저 잘 그리기 위한 사람이라면 가르쳐 줄 수 있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작가가 되고 싶다면 말이 달라지지. 의식적 교류는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말이야.”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만난 친구들 중에 작가의 길을 가는 사람은 주현이와 나뿐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다 보니 인생을 사는 자세도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도 온도차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힘든 길을 멀리 같이 갈 수 있는 동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을 교류하고 토론하고 서로 비평을 할 수 있는 그림쟁이 동료들이 말이다.
차를 타고 오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몇 달 동안 같은 곳에서 일을 하며 서로에 대하여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에서 녀석과의 대화에서 녀석을 알아 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을 하고 일 년 동안 작품을 하고 전시를 하는 것에만 몰두했지 다른 일들은 모두 생각밖에 있었다.
전시장에 도착한 영길이는 우리 부스를 둘러보고 다른 부스로 향했다. 이렇게 큰 전시는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진짜 신기한 일을 그날 오후에 생겼다. 전시 관람을 마친 영길이와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영길이는 안양으로 향해 출발했다. 자리를 오래 비운 거 같아 걸음을 재촉해서 내 부스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누군가가 명함을 놓고 간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명함의 주인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시 내 부스로 오겠다는 수화기 건너편 사람의 명함에 쓰인 브랜드가 낯이 익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벤처 사업가라고 설명을 했다. 프랜차이즈에 성공해서 국내에 180 여 개의 가맹점이 있고 해외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 주민 씨. 작품이 강렬해서 발을 뗄 수가 없었어요. 식사를 하고 오시는 거 같아서 명함을 놓고 다른 부스를 둘러보고 있었답니다.”
“ 죄송합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었지요. 손님이 와가지고요.”
“ 아뇨. 사과를 받을 일은 아니죠. 아무튼 너무 반갑습니다. 사업하는 사람 로니 우리고 합니다.”
“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양화하는 유주민입니다.”
“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 많은데 작업실로 언제 한 번 초대해 주세요. 저는 가난한 젊은 작가들 작품을 많이 사주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하하하.”
“ 역시 사업하시는 분이라 화끈하십니다. 하하하.”
그는 작품을 더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일본 개인전 때문에 준비하는 소품을 제외하고는 보여 드릴 만한 작품들이 별로 없었다.
“ 여기서 작품을 구매하면 수수료를 주최 측에 얼마나 주게 되나요?”
“ 예. 5 : 5라고 알고 있습니다.”
“ 아이고. 너무 많이 떼 가는 거 같은데요.”
“ 네. 주최 측이 준비하는데 돈을 많이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네요.”
“ 그러니까 말인데요. 저는 주민 씨 작업실에서 직거래를 하면 어떨까 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차피 다음 주면 전시도 끝나게 될 것이고 작품 옮겨 놓고 나중에 거래하면 돈은 다 주민 씨 것이 되니까요. 저는 작가들이 돈을 많이 가져가기를 희망합니다”
그가 말한 대로 작품을 한두 번 사본 사람 같지는 않은 말이었다. 미술계의 생태계를 다 이해하고 하는 말이다.
“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요. 그냥 여기서 사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제2회, 3회 골든 아이 아트페어가 열렸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주최 측도 돈을 벌어가야만 가능합니다. 이번의 이 실험적인 전시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희망하고 있거든요.”
“ 그래요? 주민 씨가 손해를 보는 데도 말이죠?”
“ 네. 대의를 위해 그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 가난 난 화가의 마음은 아니군요. 그렇다면 저기 청바지 입은 그림 아주 마음에 듭니다. 오늘은 이 작품 하나만 사야겠군요.”
내가 돈이 여유가 있어서 이런 마음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언제나 가난했고 그리고 언제나 그림과 일을 병행해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기회가 일회 단발로 끝나는 것은 너무도 싫었다. 나와 후배들 그리고 선배들까지 두루두루 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이번 전시는 크게 성공을 해야 한다.
“ 네.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작품은 250만 원입니다.”
“ 이해해 드려야죠. 나중에 작업실에 한 번 초대해주세요.”
그는 내 팸플릿과 명함을 집어 들었다. 내 명함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 누구에게 말을 해야 일을 진행할 수 있을까요?”
“ 밖에 보면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초짜인 것이 티가 날까 봐 별로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부스를 나와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스텝이 보였다. 손짓으로 와 달라고 스텝을 불렀다. 스텝과 그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그녀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 주현아. 나 그림 팔았다.”
“ 무슨 소리야? 조금 전에 가놓고는.”
“ 누가 우리 밥 먹는 사이에 명함을 놓고 가셨더라고. 그래서 전화를 드렸더니 금방 오셔서 계산하러 스텝분이랑 가셨어.”
“ 출발이 좋네. 어떤 그림 팔렸어?”
“ 최근에 완성한 청바지 입은 뒷모습 그린 거 있잖아. 그걸 고르시더라고.”
“ 축하해. 기분 좋은 출발이네.”
“ 고마워. 그래도 나름 홍보가 되긴 됐나 봐.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잘해봐야지.”
전시를 통해 그림을 판다는 것은 뭔가 모르게 사람을 더 의욕적으로 만드는 요소였다. 작품이 팔린다는 것.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팔아보진 못했지만 그때그때마다 마치 공모전에서 상을 받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벽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내 작품에 감명을 받고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경험이었고 나를 고무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을까?’
다시 내 부스로 발길을 옮겼다. 잠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는 돌아왔다. 그의 명함을 받고 작품이 배송되어야 할 주소 역시 메모를 해두었다. 작품의 가격을 나누어 갖는 대신에 주최 측에서 작품 포장 보터 배송까지 맡아서 해주었다. 아직 전시가 끝나지 않은 관계로 작품을 팔렸다는 빨간딱지를 부쳐둠으로써 작품이 팔렸다는 사실을 명시해야 한다.
“ 나중에 작업실 한 번 놀러 갈게요. 연락드리겠습니다.”
“ 네.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럼 전시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작품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응시한 뒤에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산 작품은 모델의 잘빠진 몸매가 잘 드러난 작품으로 당시에 굉장히 유행을 하던 청바지를 입은 뒤태를 그린 작품이었다. 아마도 잘 사는 사람이라면 그 브랜드를 알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도 잘 알 것이다.
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얼굴이 없다. 아마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눈에 많이 익은 모델이 누구인지 짐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굴을 그리지 않게 된 것은 초상권 문제도 있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유명한 화가가 되면 누군지 간에 작품에 본인의 얼굴이 나오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무명작가에게는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기 작품들은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명품 작업을 그리고 있었고 일본 개인전 준비도 대체로 명품 작업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의 욕망은 명품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작업실이 위치한 곳이 강남의 한 복판이어서 그런 것들이 더 눈에 보였다.
부스 전시를 하는 기간에는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기보다는 작품의 방향을 잡고 작가 공모가 무엇이 떴는지를 모니터 하는 시간에 썼다. 내 작업도 그렇고 주현이 작업도 그렇고 한 번 그리기 시작하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호흡을 길게 가지고 가면서 작업을 해야 한다. 한두 시간 정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날 정도라면 그냥 작품에 손을 대지 않는 편이 낫다. 어차피 티도 안 나기 때문이다.
전시 둘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내일부터 3일 동안은 주말에 들어가기 때문에 아마도 관람객들이 어제오늘보다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찾아온다는 사람들도 모두 주말을 기약하고 있었다.
셋째 날은 별 다른 일이 없었다. 그저 손님을 기다리는 자영업자처럼 부스 안에서 없는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금요일이었지만 관람객이 뜸했다.
경륜장 사모님께 드렸던 표는 큰 딸과 녀석의 친구가 활용했다. 갑자기 뒤에서 주민이 오빠라고 불러서 깜짝 놀랐는데 사모님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녀석은 나를 아주 편하게 오빠라고 불렀다. 입시 준비를 위해 수많은 조언을 해드렸었지만 녀석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다는 녀석은 예상보다 씩씩했다. 녀석을 임신했을 때 결핵을 앓고 계셨던 사모님은 모유를 제대로 먹이지 못해 녀석이 그래서 허약하다며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내가 보기에는 걱정할 정도의 건강은 아닌 정도로 보였다.
대한민국에서 입시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도 그 시절을 겪었지만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났다. 그래도 원하는 결과를 얻어서 다행이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다.
주현이가 디지-로그라는 제목으로 김치를 그리고 있을 무렵, 비슷한 시기에 김치를 그리는 작가가 등장했다. 수소문을 해서 안 것도 아니고 ‘미술세계’라는 잡지에 떡 하고 기사가 나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사람들 중에 그 작가가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다. 주현이 그림은 큰 사이즈에 유화로 제작을 한 것에 반해 그 작가의 작품은 작은 사이즈에 수채화로 제작이 된 것이어서 작품은 질적으로 차이가 컸다.
사모님 딸을 보내고 식사를 마치고 코엑스로 돌아와서 주현이 부스에서 미술 잡지를 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혹시 유주민 작가님 핸드폰이 맞습니까?”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여자였다.
“ 네. 맞습니다. 누구세요?”
“ 작품이 인상적이네요. 저는 차은주라고 합니다. 어디 멀리 가셨나요? 지금 작가님 부스에서 작품 감상하고 있는데요.”
“ 아.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잠깐만요.”
내 부스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급하게 이동했다. 누구지?라는 생각과 함께 자리를 너무 자주 비우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내가 자리에 없을 때마다 전화가 오는 것도 신기했다.
“ 오래 기다리셨나요? 죄송합니다.”
“ 아니에요. 작품 보고 인상적이어서 작가님 꼭 뵙고 싶었습니다.”
“ 네. 작품들은 좀 둘러보셨나요?”
“ 네. 주민 씨. 작가 양력을 보니까 작년에 졸업하셨네요? 혹시 소속되어 있는 갤러리가 있나요?”
“ 아니요. 아직 작품이 많지 않아서 열심히 작품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사동의 화랑과는 싱가포르 아트 페어 이후로 별 다른 교류를 하고 있지 않았다.
“ 잘됐네요. 우리 갤러리도 신생 갤러린데요. 앞으로 중국 진출을 목표로 두고 있어요. 주민 씨와 함께 크고 싶네요.”
‘ 뭐지? 스카우트 제의인가?’
싶었다.
신생 갤러리가 중국 진출을 노린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당시만 해도 중국 미술 시장은 최근에야 개방이 되어서 전 세계 미술인들의 관심거리였다.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경매에서도 연일 최고가 기록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 그런 경매에나 들어가 보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 그래요? 저야 밀어주신다면 영광입니다.”
“ 전시 끝나고 직원들하고 주민 씨 작업실 방문해도 될까요?”
“ 네. 물론이죠. 오후 시간에 오시면 됩니다. 거의 모든 날 저는 작업실에 있으니까요.”
“ 그래요. 그럼 다른 작품들도 구경할 겸 한 번 방문할게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그때 하는 걸로 하죠.”
명함을 주고 대표님은 홀연히 사라지셨다. 진기한 경험이었다. 이번 전시가 끝나고 나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내가 원하는 갤러리를 찾아가 볼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넨 명함을 살펴보니 갤러리는 청담동에 있었다. 청담동이라면 몇 번 가보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는 감은 안 왔지만 신기했다. 이 신기한 일을 주현이에게 빨리 말해줘야겠다.
주현이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뭔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람들이 우리의 노고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우리의 인생에 격려를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들뜬 마음은 작업실에 돌아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이제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려보자 다짐하며 잠을 청했다.
주말에 온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친구들도 약속이 되어 있었고 수현이도 새로 사권 여자 친구와 온다고 전화도 왔었다. 아무래도 주말이 전시회를 보기 좋긴 좋은가 보다.
다음날 나는 어김없이 일을 마치고 코엑스로 향했다. 예상을 했던 것보다 전시를 통해 그림을 판 작가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오늘 하고 내일까지만 전시를 하고 나면 전시 기간도 끝나게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준비를 했던 전시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이 피크가 아닐까 생각됐다.
코엑스에 도착해서 주현이와 식사를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오늘 주현이 어머니와 동생도 온다고 했다. 아마도 제대로 하는 전시에 처음으로 오시는 것일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내일 온다고 했는데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까지 다 오는 것을 보니 코엑스라는 전시장이 상징하는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들 바쁠 텐데 시간을 쪼개서 온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온다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스케줄과 시간에 맞게 전화를 하고 방문을 했다. 그때마다 내 부스와 주현이 부스에서 작품 설명과 함께 준비한 멘트와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뜻밖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래도 종종 사진으로 작품을 본 사람들은 실제로 본 작품을 반가워 하 기도했다.
주말이라 코엑스는 인산인해였다. 줄을 서서 종종걸음으로 앞사람을 따라가며 작품을 관람해야 하는 부스가 있을 정도로 몰려드는 인파는 대단했다. 나름 홍보도 잘됐고 표도 잘 뿌려진 탓인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놀란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주최 측도 많이 놀랐는지 분주해 보였다.
이날 오후에는 특별 경매가 진행이 되었다. 내 작품도 경매에 나오기로 했기 때문에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내 작품은 100호 작품으로 작품 경매 시작가가 1000만 원이었다. 작년에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선을 한 작품이었다. 작품 순번은 많이 뒤쪽이라 다른 작품들의 낙찰 향방을 먼저 엿볼 수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전체적인 경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떨리는 기분으로 경매 진행을 보고 있었다. 경매는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빨라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긴장이 되어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앞쪽에 앉은 여성 한 분이 입찰을 했다. 그 여성분은 앞선 경매에서도 몇 차례 입찰을 하신 분이었다. 내 작품은 다른 경쟁자 없이 그대로 그분이 낙찰을 받으셨다. 나 홀로 숨 막히는 시간이 흘러갔다. 아득했다. 내 작품이 경매에 낙찰을 받다니 꿈만 같았다. 비로소 꿈꾸었던 일들이 서서히 현실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들뜬 마음으로 옆에 같이 서있던 주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벅찼는지 손을 입으로 가리고 동시에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감격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얼싸안고 기쁨의 순간을 만끽했다. 더 열심히 그림을 해야 할 동력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임이 분명했다. 환희에 찬 그날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