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벽화.
64화. 벽화.
큰 매형은 다시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 그 사이 큰 누나 네는 집을 팔고 부모님과 가까운 곳으로 집을 다시 사서 이사를 했었다. 아이가 자라는데 더 나은 환경을 주고 싶어서라고 했는데 여러모로 이사를 한 집이 더 좋았다. 단지도 컸고 어린이 집이며 학교들도 초, 중, 고가 다 있었으며 근린생활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언제 다시 발령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집을 팔고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전세를 주고 부산에 전세를 얻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부산의 집값은 예전과 확연히 차이가 있다고 했다. 회사에서 정착금이 나와서 크게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었지만 부산의 집값은 심상치 않았다. 그렇게 짧은 서울생활을 마치고 큰 누나 내외는 그 작은 조카 녀석을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조카를 보고 대가로 50만 원으로 생활비로 쓰셨던 아버지가 붕 떠버리는 상황이 되었는데 작은 누나의 출산으로 아버지는 다시 작은누나의 아이를 보는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었다. 엄마는 계속 식당일을 하며 아버지와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누구라도 흐트러지면 깨질 것 같은 얇은 유리 같은 일상의 구조였다. 아찔하게 균열이 나는 것 같았지만 그나마 작은누나의 출산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모양새였다.
잘 타던 엑센트가 갑자기 길을 가다가 섰다. 예민하다고 느꼈던 클러치에 유압이 느껴지지 않아 기어를 넣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근처에 카센터가 있어서 부탁을 할 수 있어서 레커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역시 전문가여서 그런가? 금방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고 운전을 해서 카센터로 가는데 역시 전문가는 달랐다. 카센터로 들어서서 견적을 내는데 클러치에 미션까지 싹 다 갈아야 한다고 했고 견적이 100 만 원 가까이 나왔다. 그래서 그냥 녀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폐차비로 30여 만 원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차가 없이 두 달 정도 보내야 했는데 영길이가 차를 중고로 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녀석 차로 출, 퇴근을 할 수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작품에 매진을 하고 있던 터라 집에서 거의 근신을 하고 있었기에 차가 없어도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님을 뵈러 간다거나 평촌 주현이네 집에 같이 가는 일이 있는 경우에는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다시 차를 사려고 마음을 먹고 안산에 있는 중고차센터로 향했다.
영길이의 차를 얻어 타고 영길이가 차를 샀다는 딜러와 만나기로 먼저 약속을 했다. 수중에 돈은 150 만 원 정도 있었는데 영길이도 그 정도 돈으로 차를 샀다고 했었다. 산타모라는 차였는데 차 안이 넓고 좋았다. 가스차라 연비도 좋았다. 나도 그런 차를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 그 딜러와 약속을 잡았다.
“ 제가 그림 그리는 화가라 돈이 별로 없는데요.”
상금으로 받은 돈에 조금씩 모아 온 돈이 150만 원이 전부였다. 정말 이 정도 돈으로 차를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 그 정도면 제가 타고 있는 차 넘겨 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한 번 보실래요?”
별로 고민 없이 내뱉는 말이었는데 본인이 사서 싹 수리를 했으니 아마 2 년은 걱정 없이 탈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역시 이 딜러를 만나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서 차를 보니 멀쩡해 보이는 구형 카렌스였다. 이차 역시 가스차로 나온 것이었고 미션은 수동이었다. 엑센트의 수동기어에 익숙한 나로서는 괜찮았다. 바로 딜러와 영길이, 주현이를 태우고 중고차 단지를 한 바퀴 돌아봤다. 속도가 올라갈 때 나오는 소음 말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뒷 좌석이 뒤로 젖혀지면서 트렁크가 뒷 유리채로 열려서 큰 그림을 실을 수 있는 것도 산타모와 비슷했다.
“ 좋은데요. 이걸로 결정하겠습니다. 딜러님 사신지 얼마 안 된 건데. 저한테 넘기셔서 귀찮은 일 만들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딜러는 이차를 2주 전에 매입을 했고 수리를 맡기고 본인이 탄지는 열흘 정도밖에 안 됐다고 했다. 전문가가 싹 수리를 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우리 같은 소비자가 수리를 하는 것보다 더 꼼꼼하고 더 저렴하게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 매일 하는 일인데요. 뭘. 그저 잘 타십시오. 한 2년 정도는 아마도 수리 없이 타실 수 있을 겁니다.”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말투와는 다르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 같았다. 그렇게 번개 불에 콩을 구워 먹듯이 우리는 차를 한 대 구매했다. 건물 일층에서 보험을 가입하면서 나는 다시 자가용 유저가 됐다.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날지 모르는 일이어서 이번에는 자차까지 보험을 들었다.
가스차인 데다가 영길이와 번갈어가면서 운행을 하니 기름 값이 절반으로 줄었다. 가스차는 힘은 약하지만 연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청담동 갤러리에서 연락이 왔는데 갑자기 인도 전시가 취소됐다고 했다. 뭄바이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인도는 지금 아비규환이라고 했다. 외신에서 전해 들은 내용이 없어서 조금 의아했지만 성장 통을 앓고 있는 인도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년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전시를 기획 중인데 그때 참가를 해야 하니 작품은 계속 갤러리에 키핑을 하자고 해서 이번에도 역시 그러기로 했다.
단원 미술대전에 낼 그림을 준비하는 도중에 전에 그림을 사주기도 했고 작업실도 같이 쓰자고 제안을 하셨던 대표님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본인이 지금 미술관을 준비 중이라고 하는데 의논을 하고 싶다며 본인의 사무실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약속을 잡는 과정에서 최근 작품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내 작품과 주현이 작품을 다 이 메일로 보내드렸다.
주현이에게는 종종 골프 그림을 부탁하셨는데 주현이에게는 작은 부업 같은 일이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골프를 칠 일이 많았는데 골프를 치다가 보면 홀인원이나 이글 같은 샷이 나오게 된단다. 그런 경우에 같이 라운딩을 하는 사람들이 축하의 선물을 하는 관행이 있다는데 그때 선물을 하 기 위함이었다. 언제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는데 골프 그림이 비전이 있다며 그는 계속해서 주현이에게 골프 그림을 연구해주기를 바랐다.
우리는 약속 날에 맞춰서 대표님의 사무실로 갔다. 처음에는 나에게만 제안을 했지만 주현이도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 테스트 끝에 같이 보기로 했던 것이었다.
“ 주민 씨. 제가 트릭아이 미술관이라는 것을 구상 중인데 지금 작가들은 거의 다 섭외가 됐어요.”
‘트릭아트라는 것은 요즘 한참 유행하는 건데 트릭아이는 뭐지?’
가만히 들어보니 같은 개념이었다.
“ 주민 씨와 주현 씨가 직원으로 들어와서 그 작가들의 그림 그리는 법을 익혀서 나중에 일을 맡아서 해줬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야기가 된 사람들도 좀 살펴봐주고.”
섭외된 작가들의 실력을 다 믿을 수가 없고 바로 옆에서 살펴봐달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잘 그리는 작가 작법을 익혀서 나중에 팀장 같이 사람을 부려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스파이 같은 작가로 들어와서 그림 그리는 작법을 배워서 나중에 내가 사람들을 인솔했으면 하는 부탁이었다.
“ 근데 하필 왜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하시는 거죠?”
대표님은 그림을 좋아하셔서 나 말고도 작가들을 많이 알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 주민 씨 그림 정말 잘 그리시잖아요. 빨리 그리는 법만 익히면 되실 것 같고 무엇 보도 젊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들어와 보시면 아시겠지만 섭외된 분들이 연세가 다들 많으세요.”
이번엔 홍대에서 작업을 하지만 다음번에는 제주도 그리고 나중에 어디가 될지 아직 모르지만 확장을 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 급여는 시급으로 챙겨 준다고 했는데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다른 작가들 받는 급여 중에 제일 낮은 등급으로 준다고 했고 그리고 하루에 8시간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어서 시간을 그렇게 쓰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이었지만 팀으로 되어있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 우리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해보고 연락을 드리겠다며 사무실을 나왔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집에 도착을 해서도 주현이와 동네를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물류에서 일을 하는 순간에도 고민을 했다. 일단, 물류를 그만두는 것이 제일 불안한 요소였다. 언제까지 벽화 일이 주어질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많은 혜택과 관심을 주신 것은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지만 불안한 미래는 판단을 하는 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해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인생을 살면서 아무나 겪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언제 그런 작업을 해보겠는가? 언제까지 일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물류를 그만두었다. 물류 하나는 영규에게 다른 하나는 영길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누어 주면서 물류에 다음번에 은식이가 백화점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꼭 모색해보라고 했다. 내가 있는 동안에 그렇게 되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그 사이 주현이 동생은 용인에 있는 학교에 복학을 했다. 학교를 다니는데 통학이 어려워서 부모님이 사시는 집을 전세를 놓고 용인으로 이사를 하셨다. 그간 광고 모델 일을 하며 생활비를 대며 고생을 한 동생에 대한 부모님의 배려였다.
그해 있었던 단원 미술대전에서 나는 대상을 받지 못했다. 특선을 받으면서 나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단원 미술대전을 졸업했다. 추천작가가 되면 더 이상 그 공모전에 공모를 할 수가 없다. 특선도 큰 상이었지만 못내 상금이 아쉬웠다. 어찌 보면 대상을 받지 못하면서 벽화 일을 결정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주현이와 나는 내년에 결혼식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장도 알아봐야 하고 웨딩촬영도 해야 했고 가족들이 입을 한복도 빌려야 했으며 신혼여행도 알아봐야 했고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산적해 있는 문제 중에 물론 돈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중요한 시기에 벽화 일은 그렇게 소명처럼 다가왔다.
스마트 물류에서 퇴직금이 나오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하게 여유 자금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벽화로 일을 갈아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