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안양 작업실.
56화. 안양 작업실
일을 마치고 나면 주현이를 만나서 안양 여기저기 공간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걸어서 다니며 알아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동네를 도보로 다니며 임대가 붙어있는 건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등잔 밑이 어두웠다. 백화점과 가까운 골목에 들어서니 낡아 보이는 건물 3층이 임대가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백화점과 직선거리로 2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전화를 걸어보니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당장 해당 층을 보고 싶다고 말을 하자 금방 갈 수 있으니 30분만 기다려 달라는 답이 왔다. 마침 건물 앞에 슈퍼가 있었는데 앞에 파라솔에 간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백화점과도 가까웠지만 선생님 화실과도 예전 미술학원과도 가까운 거리였다. 다시 안양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안양은 익숙한 동네이며 그림 그리는 동료들이 있는 곳이다.
슈퍼에 들어가서 캔커피 두 개를 사서 나왔다. 할머니를 파라솔에 앉아서 기다릴 참이었다. 이 슈퍼는 이쪽으로 작업실을 얻으면 단골이 될 수밖에 없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파라솔 밑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첫 작업실부터 지금까지 참 이사를 많이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고생도 많이 했고 고생한 만큼 보람도 있었다. 지금까지 힘들었지만 잘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무렵, 전화가 걸려왔다.
“ 거의 다 와 가는데 어디에 있어요?”
“ 네. 바로 앞 슈퍼 앞 파라솔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이니까.”
할머니는 급하게 오시는지 숨이 차보였다.
통화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150이나 될까 하는 작은 신장에 깡 마른 몸이었지만 단아한 모습에 눈빛이 반짝이는 분이셨다.
“ 너무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요?”
“ 아. 네.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니며 흘린 땀이 식을 정도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4층도 임대가 나온 거 같은데 그것도 볼 수 있을까요?”
“ 물론이죠. 늙은이 계단 오르내리는 거 힘드니까 4층은 열쇠 줄 테니까 보고 와요.”
계단 청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청소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먼저 우리가 발견한 3층으로 향했다. 문을 따고 들어가니 아직 치우지 않은 집기들이 있었다. 공간은 약 20평 정도였는데 4분의 1 정도에 벽과 문을 만들어 공간을 분할해 놓고 쓰고 있었다. 일반 사무공간과 대표가 쓰던 공간을 분할해서 쓰고 있었는지 문에는 대표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 건축하는 양반이었는데 힘들다고 하더니 부도가 났나 봐요. 연락 준다는 사람이 연락이 없어요.”
“ 그럼 저희가 들어오게 되면 이 집기들은 어떻게 하죠?”
“ 싹 다 치워줘야지. 그건 걱정 말아요.”
“ 그럼 분할된 벽과 문도 치워주시나요?”
“ 당연하죠. 깨끗하게 싹 치우라고 해야지.”
“ 아뇨. 벽과 문은 그대로 뒀으면 해서요. 저희가 그림 그리는 사람들인데 잠자는 공간이 따로 필요해서요.”
“ 여기 주택이 아니라 겨울에는 추울 텐데. 여기서 숙식을 하시겠다고?”
“ 집이 먼 건 아니지만 작업할게 많아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벌려고요.”
“ 아이고 열심히들 사는 청년들이구만. 그거야 맘대로 해요. 나는 상관 안 할 테니까.”
우리는 부탁을 해서 4층도 봤는데 너무 넓었다. 물론, 그런 만큼 월세 또한 비쌌다. 결국 3층을 계약하기로 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보증금 500에 월세 60만 원을 달라고 하는 것을 보증금 2000에 40을 내는 조건으로 해달라고 졸랐다. 우리는 다른 임차인들 같이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순수 회화를 하는 사람들이니 우리 형편을 봐 달라고 할머니를 설득했고 진정성 있는 우리의 말은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보증금 1000만 원이 부족했다. 각자의 부모님께 500만 원씩 보태 달라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그림이 경매에 팔려서 수중에 그동안 모은 돈이랑 작품 판매 대금이랑 다 합해서 1000만 원이 있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사를 결심한 것도 이유가 됐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안양으로 와야 한다는 점에 동의해 주셨다. 흔쾌히 그간 모으신 돈을 내어 주셨다. 날짜를 정하다 보니 청담동 전시가 끝나고 난 그다음 날이 이삿 날로 적당했다. 할머니께 계약금을 드리고 등기부 등본을 볼 수 있었는데 대출이 하나도 없는 깨끗한 건물이었다. 나중에 말을 들어보니 할머니의 남편은 안양의 큰 유지였다고 했다.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에게 몇 채 유산으로 물려주신 모양이었다. 아무튼 건물주도 좋은 분인 거 같고 이제 바쁜 일도 다 마치고 나면 이사만 하면 된다.
이사를 한다니까 근처에서 살고 있던 주현이 동생이 가장 아쉬워했다.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종종 들러 커피도 한 잔 하고 가고 떡볶이 같은 간식을 사다가 같이 나눠 먹는 일도 잦았다. 녀석은 오랜 연예인과 모델 생활을 정리하고 미뤄놨던 학업을 마치려고 학교 복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니라고 해도 녀석도 변화를 갖아야 하는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청담동 전시가 오픈이라 청담동으로 향하고 있다. 하필 전시 오픈 일에 비가 내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올지가 걱정이었다. 갤러리를 개관하고 개관을 기념으로 하는 전시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그리던 그림을 정리하고 늦게 도착하지 않으려고 주현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청담동으로 이동을 했다. 작업실 위치가 신사동이라 청담동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다과와 와인이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볍게 와인을 즐기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세팅이 되어 있었다. 대표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 가볍게 인사를 했다. 대표님은 직원들과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회의가 한창인 거 같아 대표실을 나와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는데 인도부터 중국까지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 이런 작가들을 섭외했는지 신기했다. 나도 우연히 전시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발로 뛰며 작가 섭외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들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많은 소통을 이루는 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나는 작품 감상을 다 마치고 테라스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와인을 한 잔 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센티한 감상에 잠겨있을 무렵, 대표님이 언제 나오셨는지 옆에 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주민 씨. 작품 사실 분들은 안 오셔?”
라며 말을 걸어오시는데 갑자기 무슨 뜻인가 싶었다. 작품전을 준비해서 vip를 초대해서 작품과 작가를 소개하고 판매까지 하는 그런 전반적인 일을 하는 곳이 갤러리가 아닌가?
“ 네? 작품 살만한 사람들은 갤러리 측에서 부르셔야죠. 제 주변에는 작품 사줄만한 사람은 없는데요.”
센티한 기분 탓이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 그건 당연히 그렇지. 주민 씨 주변에 그림 사줄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이야?”
다소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대표님은 말끝을 흐리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작품 사줄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없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정적이 흘렀다. 아마도 대표님은 나의 강남 작업실을 오가며 내가 부잣집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가 생기기 전에 나의 상황을 말해야 했다.
“ 혹시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저 부자 집 아들 아닙니다.”
자세한 부분까지 설명을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주민 씨. 오해 같은 거 하지 않아요. 같이 일하자고 제안한 것도 전데 제가 열심히 팔아 봐야죠.”
괜한 질문을 했나 싶은 표정으로 대표님은 정색을 하셨다. 대표님이 봤을 때 내세우기도 팔기에도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일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오셨던 작업실은 저한테 과한 거예요. 조만간에 안양으로 작업실 이사를 할 생각입니다.”
“ 갑자기 무슨 작업실 이사는 한다는 거예요?”
“ 지금 아르바이트하는 곳이랑 너무 멀어서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하고 있어요. 작업에 지장이 생길 정도예요. 최선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해서 시간을 버는 것이에요.”
이미 안양에 계약을 한 상태였기에 대표님은 나의 작업실 이사는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청담동 갤러리와 일정도 그렇지만 공모전이다 전시 공모다 안양에 동료들이 많은 터라 같이 다니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차를 한 대만 빌리면 될 일인데 매번 돈도 아까웠었다.
“ 그러면 서울이랑 멀어져서 유 작가님 활동하시기 불편하실 텐데요?”
“ 그래도 시간을 벌어서 작품을 더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렇다. 대표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실은 얼마 전에 작가 공모를 한 청담동의 한 갤러리 대표님이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전시장이 세 개 층으로 100평이 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유명한 갤러리다. 그 대표님은 내 작품수 롤 보고는 3년 정도 작업을 열심히 해서 본인의 갤러리에서 초대 개인전을 하자는 말을 하고 떠나셨다. 그렇게 열심히 그려왔는데도 그런 곳에서 전시를 하려면 3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작업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 그럼 유 작가님 이사는 언제 하세요?”
“ 이번 전시 끝나면 바로 하려고요.”
날짜를 맞추어 이사 일정은 잡혀 있었다. 매번 작업실 이사를 할 때 부르는 용달 기사님이 계셨는데 공모전을 갈 때나 전시를 할 때나 열일을 제쳐두고 우리 일을 해주시는 기사님이 계셨다. 그림 몇 점 옮기는 일이 당연히 이삿짐을 옮기는 일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훨씬 수월한 것도 사실이지만 기사님은 우리와 같이 다니며 미술이며 예술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셨고 오고 가는 내내 이야기꽃이 폈더랬다. 그렇게 이 기사님은 그림을 옮기는 일에 꼭 필요한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이번 같은 경우는 일정이 연속이다 보니 이틀을 연속으로 기사님과 일정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 급하게 이사를 하시네요. 그럼 이번 전시 끝나면 우리 그림 왁구가 많이 나오는데 그거 유 작가님 다 드릴 테니 열 작 하세요.”
현재 전시를 하고 있는 작품들 대부분은 외국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림을 현지에서 천 상태로 말아서 가지고 온 것을 한국에서 왁구를 제작해서 씌우는 작업을 한 작품들이기에 그림은 다시 본국으로 말아서 돌려보내고 나면 빈 왁구들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대작들이라 100호 이상인 것들이었는데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돈을 그만큼 버는 것과도 다름없는 것이 여서 고맙게 받기로 했다.
“ 그리고 작가님 대상 받은 작품 작은 사이즈로 판화로 만들어서 판매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저야 좋죠. 그런데 팔릴까요?”
“ 해봐야죠. 그리고 이번에 사이트도 오픈하는데 사이트에서는 온라인으로 작품을 판매할 생각이에요. 이번에 가시면 작품 사진들 좀 이 메일로 보내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많이 바쁘시겠어요. 매번 보면 늘 준비하시는 게 많아 보입니다.”
“ 아니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나중을 기대해 주세요.”
“ 대표님. 항상 응원합니다.”
예민하게 시작됐던 대화는 서로를 응원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고 보니 더할 나위 없는 우리 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것을 응원해 주겠는가? 자기 돈 들여 가면서 홍보하고 애쓰겠는가? 나는 그저 매일매일 작품을 하는 일에 매진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데 그칠 것 같지 않은 비는 그쳐있었다. 비 먼지 냄새를 맡으며 길을 나서는데 길바닥에는 해가 져서 네온사인에 반사된 형상이 일렁거렸다. 메케한 자동차 매연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느리게 흩날린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극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오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오늘 전시도 오픈했는데 우리끼리 뒤풀이나 할까?”
“ 기분이 어때? 그렇게 입성하고 싶었던 청담동 갤러리에 입성한 기분이 말이야.”
“ 음. 잘 모르겠네. 멍하기만 해.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더 작품을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거.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해.”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돈을 벌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이유가 뭐였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주현이와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바쁘게 걸어온 길이었다. 가족들과 지인들 앞에 보란 듯이 둘이 함께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히 그림을 그려오며 작품을 알려오고 있었다. 그저 누구보다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제는 그림을 그리면서 진짜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을지 사실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싶어지고 있었다. 미지에 세계에 발을 들인 모험가처럼 하루하루 그저 주어진 일상을 캔버스에 물감을 채우듯 나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뛰는 심장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 거라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