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암.
내가 일을 일찍 마치고 그림을 그리러 가려고 할 때마다 기가 막히게 거래처가 늘어만 갔다. 사장님이 거래처를 늘릴 때마다 나는 보란 듯이 더 빨리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 년 가까이 일을 하다 보니 이력이 나서 그런지 이제는 별로 힘도 들지 않았고 반품은 거의 나오지 않는 수준까지 일을 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인어른 칠순 때 해외여행을 가자고 처제가 제안을 해왔다. 4박 5일을 갔다 오자고 본인이 경비를 다 대겠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일을 손에 놓고 가기가 너무 애매했기 때문이다. 세 아이를 키우며 아이 육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사장님은 내 거래처를 소화하면서 육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가 없는 상황에서의 나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사장님에게 놀러 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직 건강하시니까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안 가는 바람에 주현이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나를 두고 혼자 여행길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처제와 장인어른과 장모님 셋이서 여행을 갔다 왔다.
며칠이 지났다. 계절은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마치고 주현이를 만나러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은 3층에 있었는데 망한 가구 회사가 남기고 간 을씨년스럽게 쌓인 가구들을 지나가야 작업실에 당도할 수 있다. 오며 가며 작업실이 있다고 소문을 듣고 온 아주머니가 한 분이 계셨는데 주현이와 같이 작업실을 쓰고 있었다. 물론, 일정 비용을 주고서 말이다.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주현이는 언제나 작업을 마무리한다. 간단하게 청소를 마치고 일층으로 내려오는데 일층에는 우리가 매일 같이 장을 보는 마트가 있다. 안산 식자 내 마트 정도는 아니지만 안양에 비하면 비교적 모든 물건이 가격이 싼 편이었다. 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차려 먹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면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한다. 거의 매일 별일이 없으면 그 습관을 따른다. 주변에 잘 조성되어있는 공원을 걷는 경우도 있고 동네를 그저 돌아다니며 오늘 뭔 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고 그런 사소한 것들을 소재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걷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며 막걸리 한 병을 사 가지고 돌아와 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티브이를 보며 막걸리를 한 잔 한다. 오늘도 그러고 있었다. 아침 이슬처럼 내려앉은 일상 속의 습관들이 지금의 우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
주현이는 장모님에게 전화가 와서 안방으로 들어가서 통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안방에서 주현이가 나를 불렀다.
“ 주민아. 이리로 좀 와줘.”
나지막하게 들리는 주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영화가 만약 조용하지 않았다면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다.
“ 어. 무슨 일이야. 영화 재밌는데 안 볼 거야?”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에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주현이는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 나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내 심장 좀 네 몸으로 눌러 줄래?”
영문을 알 리가 없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현이가 원하는 대로 몸을 포개 그녀 위에 살짝 몸을 얹어 주었다. 내 가슴에서 그녀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 무슨 일이야? 장모님하고 통화하는 거 아니었어?”
걱정이 되어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니야. 아무것도.”
개미 같이 작은 목소리에는 맥이 풀려있었다.
“ 그래? 근데 심장이 왜 이렇게 뛰지?”
생각에 잠긴 듯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빛에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적이 흘렀다. 영화를 더 보고 싶다거나 남아있는 막걸리를 마저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 나는 습관적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잠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주현이가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 씻고 나온 나는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으려고 밥숟갈을 집어 들었다.
“ 아빠가 간암인 거 같아. 오늘 큰 병원에 엄마랑 같이 가보기로 했어.”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간암이라니?
“ 간암이라고? 진단이 나온 거야?”
들었던 밥숟갈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주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아 주었다.
“ 오진 일수도 있으니까 큰 병원 가서 다시 검사받아 봐야지 제대로 알지 않겠어?”
이렇게라도 현실을 부정하며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 다시 정밀 검사해봐야지. 그래서 엄마하고 다 같이 가기로 했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입을 앙 다물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줘.”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났지만 나는 애써 침착한 척해야 했다.
“ 알았어. 어서 밥 먹고 출근해. 나도 여기서 용인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아봐야겠어.”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스마트 폰을 들고 검색을 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한 번 정도 버스를 갈아타면 용인에 있는 처갓집까지 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하얗게 되어버린 머리로 어떻게 일을 하는지 모르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장인어른. 처갓집에 갈 때마다 결혼하기 전부터 나와 막걸리를 대작하며 정치며 경제며, 세상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던 분이다. 새로 이사를 한 곳에 친구 하나 만들지 못하시고 내가 오기로 한 주말이면 그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시던 분.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언제나 막걸리를 지근거리에 두고 계셨던 분. 드셨던 술이 과했을까? 간암이라니. 이제 조금 살만해졌는데 진정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기다렸던 전화는 일을 마치고서야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검사를 받고 입원하기로 결정했으니 차를 몰고 와달라는 전화. 영화 같은 반전은 없었다. 수원에 있는 성 빈센트 병원이라고 했다. 갑자기 입원하게 된 거라 2 인실이라고 했다. 나는 바로 수원 장인어른이 계시는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