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귀분 Aug 22. 2024

런 웨이는 나의 희망 꿈

음산했던 기억을 한 조각씩 꺼내어 볕에 습기 날리듯 흔적 없이 날려버리고

서울 피난민이었던 내가 기적처럼 다니기 시작한 Y읍중학교에 며칠 되지 않아 같은 반 3~4명의 아이들이 으슥한 곳으로 나를 불러냈다. “야! 너 꼴이 그게 뭐냐? 치마나 바지 한 가지만 입어. 바지위에 치마를 겹쳐 입고. 또 이 꼴로 내 눈에 뜨이기 만해? 우리 학교에 이런 피난민 거지가 있다니. 썩~꺼져!” 우리 반에서 제일 부티나는 멋쟁이 김정숙이 친구들과 함께 몰려와 나를 망신 주고 있었다. 내복도 코트도 못 입고 3킬로가 넘는 학교를 추위에 떨며 다니는 딸이 안쓰러워 어머니가 당신의 인조치마를 겹쳐 입힌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아 내 차림이 꼴불견인 것도 몰랐다. 지금 시대라면 엄연한 학폭을 당했다.


일본의 패망과 공산화로 성공한 이민 1세대이자 이민사회의 지도자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는 하루 밤사이에 숙청대상 1순위 범죄자가 되었고 야반도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우리 가족은 몇 달 동안 걷고 또 걸어 길에서 계절이 바뀌고 고국을 떠난 지 삼십 년 만에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마련되었던 집과 농토마저 관리하던 이모부의 배신과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재산가였던 우리 가족은 하루 아침에 빈민으로 전락해서 피난길에 나섰다.


전쟁이 나자 도시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려고 눈에 핏발이 서서 귀중품을 들고 농촌을 돌아다녔다. 재봉틀과 감자 한 말과 바꾸었다. 우리 집은 딸만 셋. 열 다섯 살 내가 맞이였다. 가는 곳마다 굶기지 말고 큰 아이를 달라고 했다. 그 때는 실제로 여자아이들을 남의 집에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입도 줄이고 굶는 것보다 낫다고. 어머니는 “자식을 강아지처럼 누구에게 줄까? 굶어도 같이 굶어야지” 하고 한숨을 쉬셨다. 장날이면 군복을 염색하는 즐비했다. 드럼통 밑에 불을 지피면 매운 연기. 독한 약품 냄새가 진동하고 통 속에서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진다. 카키색이 검은색으로 바뀐 군복이 눈부신 태양아래 장대 끝에 팔을 벌리고 매달려 깃발처럼 펄럭였다. 물들인 군복은 일상복의 중요한 옷감이었다. 풀 섶에 버려진 시체. 발 밑에서 터지던 폭탄. 끔찍한 광경이 일상이 되었던 지옥 같은 광경이 내 사춘기의 전부였다. 꿈이라도 꾸어질까 두렵다.


여고 시험을 친구를 따라가 치르고 합격 발표날도 잊어버렸다. 학비를 마련할 길도 없고 무슨 일을 하든 돈을 벌어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발표날은 이미 지났다. 중학교 동창 김영자가 학교 심부름으로 나를 찾아왔다. 학비는 전 학년 장학금에 숙식문제도 학교에서 해결해 주겠으니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전갈이었다. 교복은 어머니가 물들인 군복으로 만들었다. 팔도 짧고 품도 작고 어깨와 등이 갈색으로 탈색되어 노동복처럼 변할 때까지 삼 년을 입었다. 전시인데도 학력. 경시대회. 반공 웅변대회 등이 자주 열렸다. 나는 대회마다 출전해야 했다. 대회 참석때마다 전교에서 부잣집 딸 권O숙이와 교복을 바꿔 입었다. 고무조각을 덧대어 너덜너덜 기워 신은 운동화는 교장선생님이 새로 사 주셨다. 장관상을 탔다고 전교생이 다 아는 남의 교복을 입고 시상대에 서 있을 때. 트럭에는 프랑카드와 화환을 목에 걸고 읍내 퍼레이드 할 때도 학교는 축제로 들썩이는데 나는 기쁘기는커녕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싫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열 적게 웃어주던 착한 친구 O숙이. 아직 지구별에 살아 있을까? 그때 차라리 남루한 내 옷을 입는 것이 떳떳했는데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친구 옷을 바꾸어 입었던 그 몰염치가 평생 부끄러웠다.


내가 살던 곳에서 세계적인 명품 아울렛 우드 베리가 삼십 분 거리에 있었다. 미국 동부 관광 코스에 반드시 들어 있는 곳이고 특히 한국사람들은 큰손이라고 한다. 그곳에 머물다 보면 TV에서나 보던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을 쉽게 만난다. 교회 친구들과 소풍 가듯 그곳에 다녔다. 나는 그곳에 가면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돌았다. 갖가지 필수품이 다 있어 구경만해도 재미가 있었다. 오고 가는 길 9W는 뉴욕주에서 가장 아름다운길로 뽑힌 곳이다. 빌딩숲 아파트에서 좀처럼 산을 볼 수 없었던 나는 왕복길에 보는 베어 마운틴도 너무 좋았다. 단풍은 한국의 단풍과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 단풍은 선명하고 강렬하다면 그 곳 단풍은 은은한 카펫을 펼쳐 놓은 모네의 유화 같은 파스텔 톤이다. 숲 속에 살짝 보이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그 장엄한 건축미. 눈부신 스카이라인. 사관학교 옆에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드라큘라가 금세 튀어나올 듯 으스스하게 서 있는 고성은 현대 세련미와 고전건축의 장중한 대비를 보노라면 조화와 부조화의 색다른 아름다움이 보인다. 


몰을 다니면서 다시 옷이 늘어 갔다. “디자인이 색다르고 너무 예뻐서. 값이 5$~10$? 왜 이리 싼 거야? 한국에서는 이 가격에 절대 못 사지” 핑계도 갖가지였다. 한국 떠날 때 옷장을 다 비웠는데. 십여 년 넘게 살다 돌아오면서 백 년이 다된 공업용 미싱과 오버 룩 기계까지 사 갖고 왔다. 이제는 옷을 집에서 만들겠다고.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옷에 대한 감각이 남 다르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젊었을 때는 친구들이 고가의 옷을 살 때 나를 불러 냈다. 내가 시대를 잘 타고 나서 디자인이나 의상학을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며칠 전 모델 한혜진이 나오는 미라노 패션쇼를 보았다. 마지막 무대에 디자이너들이 박수를 받으며 등단하는데 뜬금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인물도 기럭지도 못 미치니 모델은 언감생심이고 있을 리 없는 다음 생이 혹여 있다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멋스러운 옷을 만들어 영혼까지 쓰다듬는 전설의 무대에 서 보고 싶다. 이제는 청청했던 세월도 다~가버렸지만 꿈을 꾸어 보겠다는데. 아무리 황당한 꿈을 꾼들 누가 뭐라할까?


곧 팡파르가 울릴 대망의 그 날. 입고 갈 옷 한 벌만 남기고 허접 한 것들을 깨끗이 비우려고 한다.


내가 옷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다 늙도록 버리지 못하는 것.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자면 사춘기와 십대에 끝을 모르고 높았던 자존감에 비해 남루 했던 가정환경의 상실감과 결핍의 간극 때문이라고 할까? 


작가 메모…

10여년 글을 썼지만 전쟁 얘기는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 예민한 사춘기에 겪은 처참한 기억을 소환하면 악몽에 시달리거나 며칠씩 잠을 못 잔다. 깊은 트라우마가 평생 따라다니며 내 가슴을 할퀴어 피를 흘리게 했다. 이제 한 뼘도 남지 않은 석양. 음산했던 기억을 한 조각씩 꺼내어 볕에 습기 날리듯 흔적 없이 날려버리고 편안히 안식에 들고 싶다.


2024. 8. 14. .

작가의 이전글 내 어머니 이삿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