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프랑크 푸르트를 거쳐 인천에 도착하는데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잠도 자지 못하고 나의 병과 증상을 되짚어 봤다.
베오그라드 국립암병원 나이 든 의사는 조직검사는 고사하고 엑스레이 한 장 찍지 않고 손으로 가슴과 겨드랑이를 만져보고는 '상황이 안 좋다,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나에게 했다. 그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나라에서 직업이란 의미는 한 가지 일을 평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손으로 이 검사만 한 의사의 말 앞에 나는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을 것인지 한국으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어린 두 아이를 남겨두고 한국행을 결정하는 것은 엄마로서 쉽지 않았다.
여름휴가, 6월부터 8월까지 이 나라 사람들은 거이 다 여름휴가를 떠났다. 내가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해도 수술할 의사들이 대부분 휴가 중이었다. 급하게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공항으로 배웅 나온 5살 딸과 8살 아들은 공항 안에 있는 작은 실내 놀이터에 정신이 팔여 있었다. 얼른 들어가라는 남편의 말에 천천히 탑승구 안으로 들어가는데 아이들이 나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며 웃었다.
" 엄마 잘 갔다 와! 빨리 오세요"
나도 손을 흔들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눈물이 먼저 나올 것만 같았다.
1년 반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건강검진을 받았다.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은 '유방암 1기 아니면 2기 정도? 그래 그 정도는 괜찮아!'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상황이 안 좋다는 의사의 말은 배행기안에서 애써 잠들려는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한국에 도착 후 가장 빨리 의사를 만날 수 있는 병원으로 갔다. 상황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유방암 3기 중에서도 심각. 급하게 수술을 받았다. 림프까지 전이돼서 오른쪽 림프를 많이 절제했다. 이제 오른팔로는 무거운 물건도 들 수 없고 모기에 물려서도 안된다고 했다. 평생 오른팔을 공주님처럼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림프부종은 말로만 들어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병실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없는 슬픔이 끝도 없이 몰려왔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절망감에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지난 8년간 이방땅에서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내가 바보 같았다. 내가 계획하고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올라가지 않는 오른팔을 보며 나는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하기 위해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힘차게 달려 나가던 나의 인생은 완전히 멈춰버렸다.
수술 후 휘몰아치는 이런 생각들은 병원침대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애써도 온몸 어디에서도 힘이 생기지 않았다. 영원히 힘이 생겨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삶은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 같았다.
의사의 권유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 하얀색 환자복을 입은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온통 초록빛 여름이었다. 멍한 눈으로 산책로를 걷다 모과나무를 보았다. 난생처음 모과 열매를 본 것이다. 그날 내가 본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과가 아니라 나를 위해 달려 있던 유일한 그 모과였을 것이다.
모과열매는 보통의 과일들과는 달리 과일꼭지가 짧고 굵었다. 그래서 울퉁불퉁한 열매가 가지에 바짝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온 힘을 끌어모아 가지를 붙잡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절대로 놓을 수 없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기보다 사력을 다해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살기 위해 온몸으로 가지를 붙잡고 있는 초록색 열매 위로 여름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과나무 앞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날 나를 멈춰 세운 그 선명한 존재감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저 모과 열매처럼 나도 온 힘을 다해 부서져 버린 나의 삶을 다시 붙잡고 싶어졌다. 그 후로 너무나도 힘든 치료 과정 속에서 나는 자주 그 모과열매를 생각했다.
지금도 우연히 모과나무를 보면 한동안 그 열매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온 힘을 다해 가지를 붙잡고 있는 그 녀석을 대견하게 바라보게 된다.
세상에는 우리를 힘나게 하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 얼음이 잔뜩 들어간 아아 한잔, 따끈한 국물요리까지. 찬찬히 생각해 보면 우리를 힘나게 하는 것들이 많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신은 삶 곳곳에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작고 빛나는 것들을 미리 놓아둔 것 같다. 그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고양이가 자신을 다시 살게 했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우리를 살게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고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모과 열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