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일주동로 8823번지

by 정미리

남편은 며칠 전부터 논 구경을 가자고 난리다. 제주도는 물이 고이지 않는 현무암 지대라 애초에 논농사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논이 있을 리가 없고 정말 논이 있다면 그것은 큰 구경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서귀포시 일주동로 8823번지, 이곳에 있는 커다란 하논분화구가 바로 남편이 말하는 제주 유일의 논이었다. 하논 분화구는 일반적인 화산지형과는 다른 마르형 분지로, 마르 밑바닥은 편평하고 물이 고여 커다란 논밭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귀포 사람들은 그 땅을 큰 논이라고 하여 하논이라고 불렀단다. 남편이 부지런히 설명한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아이들에게 일요일은 합법적으로 온종일 게임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런 날을 희생하면서까지 볼만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두 아이를 남편은 비싼 외식으로 꼬셔냈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 남편은 더 서두르고 있었다. 제주시에서 한참을 달린 것 같다.

"얘들아 다 왔어! 일어나"

아빠의 활기찬 목소리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부스스할 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논이 있다는 거야?" 나 역시 피곤한 몸으로 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남편이 그렇게 자랑하던 논은 보이지 않고 지그재그로 이어진 긴 나무 계단만이 보였다.

앞서가던 남편이 나무 계단 앞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그런 남편옆으로 가니 잠시 입이 벌어질만한 풍경이 내 발아래로 펼쳐졌다. 정말 논이었다. 그것도 엄청 큰 논이 우리 발아래,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보다 한참 아래 숨어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내가 어려서부터 봐왔던 청보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같은 초록의 낟알이었지만 벼이삭의 출렁거림은 더 묵직하니 야무진 데가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논 앞에 흥분했고 아이들은 아래로 뻗어있는 긴 나무 계단의 급경사 앞에 흥분했다. 우리는 논밭을 향해 일제히 달려 내려갔다. 금세 지치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의 달리기는 지치는 법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지 앞으로 내어달리는 것은 아이들의 본능일 것이다.


그 깊은 땅 아래에서도 벼이삭은 뜨거운 햇살을 받아먹으며 야무지게 낟알을 키워내고 있었다. 논두렁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양손으로 벼이삭을 조심조심 쓰다듬어 보았다. 확실히 보리보다는 더 부드러웠다. 굵은 낟알이 생생하게 만져졌다.


사방이 작은 산들로 둘러싸인 하논은 주변 지표보다 1m 이상 더 깊었고 동서방향 1.8km 남북방향 1.3km의 초대형 분화구였다. 아이들과 나는 초록물이 출렁거리는 논에서 두 팔을 벌리고 깊은 분화구의 기운을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평범한 날의 일기예보는 틀릴 때가 많았지만 이런 날의 비 소식은 정확했다. 갑자기 생겨난 먹구름의 검은 기운에 놀라는 그 짧은 순간, 사나운 소나기는 이미 우리 머리 위에 당도해 있었다. 순식간에 장대 같은 굵은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논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신나게 내려왔던 무수한 나무계단을 빗속에서 올려다보니 너무나 아득했다. 급한 대로 논밭 구석으로 피했다. 그런데 그곳에 넓고 싱싱한 토란이 자라고 있었다. 어릴 적 우산처럼 쓰고 다녔던 토란잎이 비와 함께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물가에서 자라서 그런지 잎사귀는 아주 크고 초록이 선명했다. 힘껏 토란잎을 꺾어 아이들에게 하나씩 쥐어주고 나도 토란우산을 하나 챙겨 썼다. 토란우산 위로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머리 위에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한 여름의 소낙비는 커다란 토란잎 속에서 순식간에 초록물이 들어 버렸다.


온통 초록색인 이 자연방수 우산은 아이들에겐 새로운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이미 젖어 버린 아이들은 토란우산에 모인 빗물을 서로에게 흩뿌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토란잎 속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이들의 얼굴 위로, 옷 위로 그리고 신발 위로 떨어졌다. 모두가 온통 초록물이 들고 있었다. 그 놀이틈에서 어린 딸을 보호하려고 행복하게 애쓰는 키 큰 남편이 참 싱거워 보였다.

하논분화구 한쪽 구석에서 토란우산을 쓰고 소낙비를 맞는 풍경은 한 여름에 우연히 만난 과분한 낭만이었다.


그토록 요란스럽던 소나기는 금세 그치더니 해가 다시 나왔다. 시간은 늦은 오후로 흐르고 있었지만 한 여름의 기운찬 해는 보란 듯이 여전했다. 그런데 그때 비를 흠뻑 맞은 초록 논에서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하얗고 뿌연 물안개, 그 느리고 섬세한 안개의 움직임은 비를 쫄딱 맞은 나에게는 경건하기까지 했다. 초록색 논을 조용히 감싸 안고 벼이삭 하나하나를 쓰다듬는 느리고 경건한 그 손짓에 나는 잠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토란우산을 쓰고 감당할 수 없는 그 풍경 앞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요란한 물장난을 치고 딸아이는 엄살을 부리며 아빠뒤로 숨고 있었지만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온 세상의 수많은 소리가 일시에 음소거되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하얀 물안개만 보이는 시간. 순간 나는 이 황홀한 논밭 속으로 달려가 그 풍광을 와락 껴안고 싶었다. 힘을 다해 달려가 그 희뿌연 초록에 깊이 빠지고 싶었다. 그 깊은 분화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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