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나는 깜깜한 순간이었다. 그 깜깜한 순간에도 핸드폰 '까똑'소리가 요란했다. 제주시 전역이 거이 정전이 되었다고 서로 소식을 알리며 그 당황한 순간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지독한 폭염 탓에 전기사용량이 엄청나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정전의 시간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남편은 피아노 위에 진열돼 있던 양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아이들이 체험학습에서 만든 양초가 정말로 제 구실을 하는 날이었다. 예쁜 유리컵 속에서 3개의 불 방울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정전은 꽤 괜찮은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온 동네가 깜깜했다. 한라산 중산간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시내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아파트 마당에는 더위를 참지 못한 아저씨들이 런닝 바람에 할 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 거리는 듯했다.
우리 아파트 최고층인 7층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깜깜한 세상은 너무 고요해서 평화로웠다. 그 어둠과 고요 속에서 수많은 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아주 깡 시골에서 자랐다. 동네의 유일한 가로등은 9시가 되면 꺼져버렸다. 가로등 마저 꺼지면 동네는 온통 어둠 속에 잠겼다. 시골의 밤은 잠자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밤은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마당 평상에 홀로 누워 있으면 어둠 속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개 짖는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여름이건 가을이건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 사각사각 풀숲을 기어 다니는 작은 풀벌레소리, 늦은 시간 또각또각 집으로 돌아가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내 얼굴 위로는 까만 밤하늘이 융단같이 펼쳐져 있었다. 그 검은 융단 위에는 수천 개쯤 되는 별들이 빼곡히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 그 융단을 힘주어 털어내면 후드득하고 별들이 내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 어둠 속에서만 들리는 소리를 나는 평상에 누워서 들었다. 여름밤의 수많은 소리는 서로 뒤엉키지도 않고 선명하게 자신의 소리를 냈다. 신기하게도 그 소리들은 다른 소리에 묻히지도 않았고 또 다른 존재의 소리를 방해하지도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소리 사이사이에서 자신의 소리를 야무지게 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소리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개구리의 길고 늘씬한 뒷다리, 귀뚜라미의 까만 눈동자, 메뚜기의 겁먹은 표정, 도둑 없는 동네에서 할 일 없이 한번 짖어보는 동네 개들의 맹한 얼굴까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 얼굴들을 상상하게 했다. 후드득 떨어질 듯한 총총한 별들을 보며 그 얼굴들을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맛이었다
오늘같이 또 긴 정전의 밤이 찾아온다면 나는 또다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찾아 볼 것이다. 그 생명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이런 완전한 어둠 속에서만 누릴수 있는 한 여름밤의 호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