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설 새 마음이 어딘가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유교적 신분질서가 엄격한 시대에 서자로 태어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의 손을 거쳐가지 않으면 책이 제구실을 할 수 없다 말할 정도로 그는 소문난 독서광이었다.
어느 춥고 배고픈 겨울, 그는 목숨처럼 아끼던 책(맹자)을 팔아 양식을 사서 아이들을 먹였다.
아버지로서의 무능함과 서자로써의 무력감, 책 한 권도 사치인 자신의 운명에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친구 유득공을 찾아갔다.
“맹자께서 양식을 잔뜩 갖다 주시더군”
이덕무는 책을 팔아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를 이런 말로 한탄했다.
이런 친구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유득공이 말했다.
“나도 좌 씨에게 술이나 한잔 얻어먹어야겠네”
유득공은 자신이 아끼던 책 “좌씨춘추”를 팔아 술을 사 오게 했다.
그날 이덕무와 유득공이 나누어 마신 술맛은 어땠을까?
추운 겨울을 잊을 만큼, 자신들의 신세를 잊을 만큼 진하고 달근 했을 그날의 술맛. 양볼이 빨개지도록 행복했을 두 선비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목구멍을 타고 뜨끈하게 내려갔을 술과 우정의 맛을 상상해 본다. 그 술 한잔이 부렸을 놀라운 마법을 생각할 때 책을 읽는 나마저 행복했다.
늦은 밤 친구가 대문을 두드렸다.
친구는 커다란 냄비를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낚시를 갔던 친정아버지가 잡은 '다금바리'로 국을 끓였다고 했다. 큼지막한 '다금바리'를 보자 내 생각이 나서 얼른 국을 끓이고 냄비째 들고 달려온 것이다. 뚜껑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매끄러운 미역들 사이사이로 하얀 생선살이 푸짐했다. 맛도 보지 않았지만 뽀얀 국물에서는 감칠맛이 폭발하고 있었다. 친구는 '내일 아침에 먹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냄비를 들고.
냄비를 받아 들자 마치 깊은 산중에서 캐 온 산삼을 받아 든 것 같았다.
독성항암제를 맞으면 온몸에 면역력뿐 아니라 마음의 면역력마저 무너져 내렸다. 나의 신세가 처량하고 나의 연약한 몸이 애처로워진다. 거대한 슬픔의 파도가 연약해진 나를 집어삼켜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질 않는다. 어떤 힘이 다시 생겨나지 않을것 같은 무력감으로 나는 침몰하는 배처럼 그저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가난한 이덕무에게 책을 팔아 술을 사주는 유득공이 있듯 나에게도 늦은 밤 생선국을 냄비째 들고 오는 친구가 있었다.
이덕무에게 가난과 서글픔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지금 이 상황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게 해주는 늦은 밤 친구의 방문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 밤에 밥 한 숟갈을 말아 생선국을 먹었다. 뜨끈한 국물이 식도를 넘어간 순간 연약해진 몸이 바로 치료되는 기분이었다. 진한 다금바리국물을 마시고 말캉한 생선살을 씹으니 뜨끈하고 행복했다.
다시 일어설 새 마음이 어딘가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