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아침마다 클래식 방송을 듣게 됐다. 딸을 등교시키는 차 안에서 한동안 정치 방송을 듣다 채널을 돌려버렸다. 정치란 것이 원래 말도 안 되게 우기면서 싸우는 세계라 계속 듣기가 힘들었다. 나는 클래식은 1도 모르지만 듣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내가 고상해지는 기분이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라디오 사연이 도착했다. 생사를 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 자란 딸이 아버지와 함께 브람스의 음악을 듣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그러면서 브람스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음악을 신청했다. 순간 나는 그녀의 사연에 너무 놀라 잠시 멍해져 버렸다.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다투는 아버지를 보며 브람스의 음악이 생각난다고?' 딸이 보낸 사연은 너무나 담담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라디오 사연을 듣는 그 짧은 순간, 음악이 얼마나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거대한 한계 앞에 직면했을 때 무엇이 인간을 끝까지 인간답게 할 수 있을까?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가진 놀라움 중 하나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모차르트는 죽어가는 침대 위에서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음악을 생각했다고 한다. 베토벤 역시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음악을 생각하고 작곡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의 마자막 연주자들이 생각이 났다. 설사 이러한 미담들이 다 진실이 아니어도 나는 아침사연을 듣고 나서는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한계상황 앞에서 음악은 그것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대하게 그리고 존엄하게 지켜내고 있다고.
그러고 보면 예술은 사람 앞에 놓인 한계를 과감히 밟고 날아오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온갖 기계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을 아버지를 보며 브람스의 음악을 생각하는 그 딸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브람스를 알려준 분은 아버지가 아닐까? 젊었던 아버지와 함께 브람스를 들었던 어렸을 딸을 상상해 보았다. 그 음악 속에 흠뻑 빠져 아버지와 함께 보냈을 시간들이 그려졌다. 그리고 지금 한없이 연약해진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충만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병원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다 자란 딸이 마음이 느껴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아버지와 함께 이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딸의 마음이 내게도 전달되었다. 음악이 얼마나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지를 생각하게 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