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힘든가 보다, 난 행복한데'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생이 힘든가 보다. 난 행복한데!

by 정미리

며칠 전 '데미안'을 처음 읽었다는 친구는 귤 농사를 짓는다. 결혼을 늦게 해서 막내아들이 아직 초등 1학년이라 자식농사도 갈길이 멀었다. 그래도 개구쟁이 막내아들 때문에 웃을 일이 많다고 종종 말한다.


친구는 며칠 전 도서관에 갔다가 초등생 수준의 '데미안' 그림책을 발견했다. 이제 50이 되어가지만 부끄럽게도 데미안을 끝까지 읽어 본 적 없는 친구는 그 그림책을 빌리며 어찌하든지 이번에는 이 유명한 책을 다 읽고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얇은 그림책이라도 내용은 여전히 어려웠다고 한다.


초등 1학년 아들은 독서기록장을 쓸 때마다 최대한 글밥이 적은 골라 읽었다. 식탁 위에 있던 데미안 그림책이 마침 글밥이 적어 아들은 냉큼 들고 가서 읽었다고 한다. 친구는 이 어려운 책을 아들은 과연 얼마나 이해했을까 싶어 아들의 '한 줄 독서기록장'을 몰래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생이 힘든가 보다. 난 행복한데!!'

이 한 줄을 읽고 친구는 그야말로 빵 터지고 말았다고 했다.


귤 농사를 짓는 친구 부부는 올해 심하게 해거리를 하는 귤나무와 이상기온으로 인한 열과 현상으로 열매가 터져버리는 감귤 때문에 무척 속상해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자연의 사이클 앞에 일 년 농사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처럼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 아빠의 한숨소리가 그 개구쟁이 녀석 귀에는 늘 비껴가나 보다. 그렇게 비껴가는 귀를 갖고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인생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이 아이를 앞에 두고도 어려운 책 속에서 삶의 심오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친구는 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어쩌면 인생의 깊은 깨달음은 어려운 책 보다 날마다 기쁘게 살고 있는 이 어린 녀석의 감사노트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는 아들의 감사노트를 보여줬다.


'엄마 아빠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 따뜻한 집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 재밌는 만화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콩밥을 안 먹어도 돼서 감사합니다.'

' 학원을 안 가는 주말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녀석은 날마다 행복했다.


인생의 깨달음과 행복은 날마다 내 옆을 지나가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눈과 귀가 없는 건 아닐까?

깊은 한숨소리는 비껴가고 작은 행복은 찰떡같이 알아보는 녀석의 눈과 귀를 나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