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나가면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었다.1

70번가에서 먹물간장을 사는 여자

by 정미리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우리를 중국여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이씨 식탁에 모여 앉은 우리는 뜨겁고 용감한 한국의 그녀들이었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 세르비아는 오랜 내전과 나토 공습으로 도시 곳곳에 폭격현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밀로세비치의 인종청소 때문에 시작된 유엔의 경제제재가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정치와 경제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이 나라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좋은 날씨와 풍성한 농산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에 가면 달고 맛있는 과일이 가득했고 신선하고 좋은 밀로 만들어진 빵 냄새가 아침이면 모두의 식욕을 자극했다.


우리 가족도 아침이면 신선한 빵과 요크르트를 먹었고 아이들은 공립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녔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언어를 익혀야 해서 무지막지하게 쓴 터키식 커피를 이웃들과 날마다 마셨다. 처음 이 커피를 마신날 그 쓴 맛에 머리가 띵하고 울리더니 위장이 번개를 맞은 듯 쓰렸다. 그러나 그 커피를 마시는 날이 늘어날수록 강한 엑센트에 노래하는 듯한 그들의 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날마다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곳에는 아시아마켓이 없었다. 그 말은 아시아인이 살기엔 외롭고 배고픈 나라란 뜻이다. 특별히 노란 메주콩으로 만들어진 감칠맛 폭발하는 간장 맛은 항상 그리웠다. 저녁이면 우리 가족은 한식을 먹었는데 한국인의 밥상에 올라오는 모든 반찬과 찌개와 찜요리에 간장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그때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간장이 필요할때마다 외곽지에 있는 70번가에 갔다. 그곳은 장사하기 위해 세르비아로 들어온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작은 중국이었다. 그곳에는 나를 닮은 동양인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높고 요란했고 중국어를 못 알아듣는 나를 보는 눈은 매서웠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중국인들은 물건을 사고 파는데 필요한 숫자와 자신이 파는 물건이름 이외에는 어떠한 세르비아어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가난한 세르비아 사람들은 온통 중국물건을 쓰면서도 중국인은 무시했다. 물론 중국인들은 그런 시선쯤이야 돈으로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중국 상인들은 수십 가지의 물건이 가득 쌓인 비좁은 가게에서 서서 밥을 먹으면서도 장사를 했다. 입 속으로 밥을 넣는 순간에도 돈을 벌어야 하는 그들은 손님이 뭘 물어보든 상관없이 무조건 가격만을 외쳤다. 그럴 때면 입안에 있던 밥알이 사정없이 튀어나왔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그럴 때마다 내가 더 부끄러웠지만 그들은 돈을 세느라 부끄러울 틈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나는 그곳에서 간장을 샀다. 그러나 간장을 살때마다 너무 고민스러웠다. 간장병에 쓰인 이상한 한자들 중에서 내가 아는 콩두(豆) 자를 찾지만 보이지 않고, 과연 이 시커먼 것을 나와 가족이 먹어도 안전한 지를 매번 의심했다. 중국간장은 심하게 made in china였다. 간장인지 먹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검고 걸쭉했다. 이 간장이 가진 놀라운 재주는 모든 요리를 검게 물들인다는 것이다. 하얀 닭고기도 초록색 야채도 이 간장을 넣고 요리하면 다 검으스름하게 변했다. 정말 이게 콩으로 만들어진 것이 맞을까? 항상 의심하면서도 이 먹물간장을 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리운 간장맛이 나기 났기 때문이다.


진짜 간장을 본 적 없는 아이들도 무슨 재료를 쓰든 맛만 있으면 된다는 남편도 중국간장으로 검게 졸여진 찜닭을 맛있게 먹었다. 같은 식탁 위에서 나 혼자만 '아는 것이 병이구나' 하며 조금씩 먹었다. 아시아 마켓이 없으니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나 독일로 가지 않는 이상 나는 이 먹물간장을 먹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렇게 간장맛이 그리웠다.